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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은희,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삶…세기의 결혼→납북→망명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이었다.

16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타계한 원로배우 최은희는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자,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였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납북과 탈출 그리고 수백 편에 이르는 영화 출연과 제작·연출까지. 고 최은희의 인생은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고인은 1926년 11월 경기도 광주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방공연습을 갔다가 배우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어머니)의 소개로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다. 이후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뒤 극단 아랑과 극예술협의회 등에서 연기력을 쌓았다.

최은희가 지난 2017년 서울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미소짓고 있다. 연합뉴스

최은희의 원래 이름은 경순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에서 여류 소설가 박화성 씨의 소설 속 주인공 은희로 개명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영화 <새로운 맹서>(1947)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서구적이고 개성 있는 미모와 연기력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군림했고, 1954년에는 주한미군 위문 공연 차 방한한 할리우드 톱스타 메릴린 먼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했다.

고인은 <새로운 맹서>를 찍으면서 촬영감독 김학성 씨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른다. 고인의 나이 18세 때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서 헤어지게 된다.

고인은 1953년 신상옥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신 감독과 사랑에 빠진다.

결혼을 한번 했던 여배우와 총각 신상옥의 만남은 당시 세간의 화제였고, 두 사람은 1954년 3월 한 여인숙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른다.

고인은 전성기에 1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갔다. 19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교장 겸 이사장을 맡았고, 극단 배우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후배 연기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23년간 이어진 고인과 신 감독의 협업은 1976년 이혼으로 끝이 난다.

이혼한 고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안양영화예술학교의 해외 자본 유치차 1978년 1월 홍콩에 갔다가 홍콩 섬 해변에서 북한으로 납치된다. 그리고 8일 뒤인 1978년 1월 22일 오후 3시쯤 김정일의 환영을 받으며 평양 땅을 밟았다.

고인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2007)에서 “김정일은 나에게 온갖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썼다.

납북 6년째인 1983년 3월 3년 만에 김정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고인은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을 만나게 된다. 신 감독은 고인이 납북된 그해 7월 사라진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 일각에선 신 감독의 자진 월북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영화 <춘향전>에 쓸 부속품을 구하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그곳 성당에서 둘 만의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두 사람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현지 미국 대사관에 진입, 망명에 성공했다. 부부는 이후 미국에서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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