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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아이도 어른을 키운다!…‘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스물두 번째 책은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토니 모리슨 지음 /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이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표지

“아이들은 절대 잊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토니 모리슨이 2015년 발표한 소설이다.

토니 모리슨은 1970년 첫 소설을 펴낸 이후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불과 11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4~5년에 한 편씩의 소설이 출간된 것인데,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복창이 터질 만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주기는 꽤 합리적이다. 1988년 토니 모리슨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빌러비드>의 출간 이후 그녀의 신작은 전 세계가 기다린다. 그녀의 작품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위해 필요한 번역의 숙고 과정, 그리고 출간 이후 작품 해석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을 염두에 둔다면, 4~5년은 최적의 숙성 간격이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단기간에 소비시켜 버리고 마는 우리의 전반적인 출판환경과 비교하면 말이다.

아무튼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원작 출간 이후 우리 손에 들리기까지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언제나 믿고 읽는 정영목 교수의 번역이기도 하지만, 충분한 시간 속에서 충분한 숙고가 이루어진 듯하다.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쓴 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문장들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깊이가 있다.

주인공 브라이드의 엄마 스위트니스는 이제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한 자신의 딸을 자랑스러워한다. 엄마가 성장한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이야기가 될까 싶긴 하지만, 역시 토니 모리슨이다. 엄마와 딸이라는 그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관계, 그 얇은 간극 사이에 엄청난 인간의 서사를 펼쳐 놓는다.

1990년대, 피부색이 밝은 어느 흑인 여성에게서 룰라 앤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그런데 아주 새카만 피부다. 아이의 피부색을 보고 엄마는 경악한다. 아버지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며 결국 집을 나가 버린다. 엄마는 자신에게 불행의 원인이 된 딸에게 정을 줄 수가 없다. 심지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한다. 이런 정신적 학대 속에서 룰라 앤은 엄마가 자신을 손바닥으로 때려주길 기도할 만큼 사랑에 굶주린 채 성장한다. 여덟 살 때는 백인여성을 아동 성추행범으로 무고한다. 단지 엄마의 관심과 자랑스러움을 얻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이다.

작가는 각 챕터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1인칭으로 시점을 바꿔가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세월이 지나고 룰라 앤은 성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지워 버리려는 듯 이름을 ‘브라이드’로 바꾼다. 그리고 화장품회사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모티브 중 하나는, 자신의 피부색에 대한 인식이 주인공 브라이드에게서 극적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성인이 된 브라이드는 자신의 흑단처럼 검은 피부가 굉장한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엄청난 열등감을 선사했던 바로 그 지점이, 미모에 대한 자의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내면적 인식의 전환은 그 자체로서 굉장한 드라마가 된다. 브라이드의 이런 인식전환은 마치 도미노처럼 엄마의 인식도 무너뜨린다. 엄마는 이제 아름답고,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한 딸을 보며 ‘아이들은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대판 ‘미운 오리 새끼’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토니 모리슨은 현대인들의 온갖 욕망의 초상들을 만화경처럼 비춘다. 마법 같은 글 솜씨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성장의 기억-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65.1x53㎝, Oil on Canvas

어릴 때의 기억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서 어른이 된다. 나의 경우는 크레파스다. 부모님으로부터 크레파스를 처음 선물받았던 날의 그 기분과 느낌을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도 붓을 잡을 때마다 그날의 느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느낀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낙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이렇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의 시작은 바로 ‘크레파스’다. 크레파스는 내 황홀한 사랑, 그 최초의 기억이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나는 벅찬 감상을 빨리 화폭에 옮기기 위해 곧바로 붓을 들었다.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낸 ‘성장을 위한 풍경’을 떠올렸다. 그러자 형태보다 먼저 색깔의 조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색의 조각들로만 이루어진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어른을 만드는 형상.

‘키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곁에 두고, 보호하며, 성장을 지켜보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키운다는 것의 정의가 그렇다면 어른만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른 역시 아이의 성장을 통해 다시 성장한다. 아이도 어른을 키우는 것이다. 나는 손에 든 붓으로 이것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절대로 잊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간절히 소망했다.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이 그런 악하고 추한 세상에 던져지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분명한 가치다. 아이들에게 바로 그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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