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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 인생과 행복의 비밀을 들려주는 ‘슬픈 날엔 샴페인을’

intro

천지수는 화가다.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에는 ‘지오반니 페리코네’ 이탈리아미술대전(La pittura 4 edizione ‘Giovanni Pericone’)에서 대상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갈증을 느낀다. 그러던 2008년, 그녀는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한다. 사자처럼 지낸 그 2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은 천지수가 예술가로서 자기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천지수에게 아프리카는 ‘맹렬한 생명’ 그 자체였다. ‘천지수의 책 읽는 아틀리에’는 사자의 영혼을 가슴에 새긴 화가 천지수가 ‘책의 밀림’ 속에서 매일매일 미술적 영감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스물세 번째 책은 <슬픈 날엔 샴페인을>(정지현 지음 / 그여자가웃는다)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이란 없다.”

그렇지. 그렇겠지. 아름다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제일 좋은 희망이라는 것도 없고, 제일 좋은 용기도 없으며, 제일 좋은 사랑이라는 것도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제일 좋은 것들이니까 말이다.

<슬픈 날엔 샴페인을>이라는 책을 읽었다. 슬픈 날이기는커녕 내 인생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날에 나는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를 위해 집을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모든 전시회 준비가 그렇듯이 한동안 나는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여기서는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고 나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언제 앉아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일 이 시간이면 나는 후쿠오카의 전시회장에 있을 것이다.

탁자 위에 올려둔 여권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스프린터의 심정이랄까. 그때 나는 생각했다. 샴페인이 필요한 시간, 그리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인생. 순간 나는 행복감에 휩싸였다. 이런 행복감 속에서 나는 왜 <슬픈 날엔 샴페인을>이라는 제목에 눈길을 던졌을까? 어쩌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비슷한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각성의 용도처럼 말이다.

<슬픈 날엔 샴페인을>의 저자 정지현씨는 와인의 산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살고 있는 와인 칼럼니스트다. 와인에 관한 책이지만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싸고 희귀한 와인들을 보란 듯이 권유하거나 와인에 대한 지식을 우쭐대며 늘어놓는 식의 책이 아니다. 사실 와인을 설명하면서 이런 기상천외한 비유들을 갖다 붙이는 책은 처음 봤다. ‘화이트와인이 콩나물국이면, 레드와인은 된장국’이라니. 정말 개구쟁이 같은, 그런 느낌의 책이다. “김치를 먹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와인에도 큰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와인은 주관적인 음식’이라는 표현이 좋았다. 와인은 물론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음료이지만, 음료를 마시는 데 심각하거나 신중해야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첫 일본 전시회를 앞두고 조금은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위로와 자신감의 메타포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이란 없다’라는 문장에서 ‘와인’ 대신 ‘그림’을 넣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세상에 제일 좋은 그림이란 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어. 나에게는 나만의 표현이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도취(陶醉)! 좋은 문장은 마치 술과 같아서 사람을 이리도 기분 좋게 고무시킨다.

와인은 그림과 여러모로 닮았다. 어떤 와인이 좋은 것이며, 어떻게 마셔야 하냐는 질문과 똑같이, 어떤 그림이 좋은 것이며,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늘 묻는다. 나는 그런 질문에 늘 장황했다. 하지만 이젠 <슬픈 날엔 샴페인을>처럼 아주 심플하게 대답해 줄 수 있겠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제일 좋은 그림이야!’ 하고 말이다.

훌륭한 와인을 만드는 조건은 우수한 포도알이라고 한다. 햇빛과 흙과 물 그리고 그에 맞는 기후가 모두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다양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포도알이 자라난 곳의 기억과 비밀과 추억이 포도알에 거울처럼 비춰지는 것을 상상했다. 일본에서의 전시회 참여일정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포도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붓을 들었다.

‘포도알의 비밀-슬픈 날엔 샴페인을’, 45×38㎝, Oil On Canvas 2018

훌륭한 샴페인은 꿀이나 이스트, 초콜릿과 버섯 같은 향, 사과와 레몬, 딸기와 멜론, 체리, 자두 같은 과일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책의 설명처럼 한 알의 포도에 나만의 다채롭고도 비밀스러운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포도알의 비밀’ 이라는 제목부터 생각이 났다. 캔버스에 우선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고 나의 온갖 성장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물감으로 발랐다. 모두 비밀스러운 나만의 기억이기에 추상적으로 표현됐다. 동그라미는 물론 포도알의 형상이지만, 동그라미를 통해서 내가 보고자 하는 다른 세상이기도 하다. 한 알의 포도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 말하자면 햇빛과 바람이 준 행복. 달빛의 외로움. 부드럽던 농부의 손길과 노랫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으깨짐! 그로부터 시작되는 발효! 나는 포도알이 간직한 그 모든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 잔의 와인이 된 포도알의 기억은 어느 행복한 사람의 뛰는 가슴이나, 슬픈 사람의 입술에 가서 닿을 것이다. 인생의 가장 내밀한 순간 가장 비밀스럽게 말이다. 이 또한 그림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세계를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그림 앞에서 가장 내밀한 이야기들을 토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와인을 음미하고 있다면 그때의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가 된다. 책에는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5분이면 인생 전체를 꿈꿀 수 있다. 시간은 그렇게 상대적이다.”

내가 그려놓은 포도알의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행복한 나를 꿈꾼다.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 편안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그 와인이 바로 가장 좋은 와인이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슬픈 날엔 샴페인을>은 와인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인생과 행복의 비밀도 함께 알려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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