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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박은주의 36.5!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기막히도록 담백한 인생의 맛, 봉태규의 ‘개별적 자아’


intro

박은주는 조용한 사람이다. 침착한 응시를 좋아한다. 그녀는 방송프로듀서다. 방송은 세상을 응시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선택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가 되자 곧 카메라의 언어에 매료됐다. 영상을 악기처럼 연주하고 싶었다. 급기야 자신만의 언어로서 세상에 말을 걸고 싶어졌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단 하나의 질문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프로듀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뜨거움은 도무지 답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고민했다. 그 고민의 끝에서 박은주는 결국 사람의 온도를 떠올렸다.

“더 나은 세상은 꼭 사람의 온도여야 한다.”

현재 박은주는 tbs의 서평 프로그램 <TV책방 북소리>를 3년째 연출하고 있다. ‘PD 박은주의 36.5!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는 책을 품은 이들이 간직한 그들의 체온을 확인하는 일이다. 세 번째 저자는 배우 봉태규다.

다른 간이 필요 없는 시원하고 담백한 육수, 구수한 메밀의 향과 은은하게 올라오는 육향이 살며시 코를 자극한다. 주로 마음의 희로애락을 음식으로 달래는 나에게는 요즘처럼 안팎으로 시끄럽고 복잡한 날이면 늘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바로 평양냉면이다. 담백하고 구수한 맛의 연상만으로 내 침샘을 자극한다. 그 담백함으로 내 머리와 가슴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싶어서일까.

여기 평양냉면과 닮은 한 명의 배우가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지금도 정진 중이다. 그는 맛깔 나는 연기로 유명하다. 워낙 개성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탓에 사람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매콤한 함흥냉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그가 에세이집을 냈다. <개별적 자아>(안나푸르나)라니. 어이없을 만큼 심각한 제목이다. 배우 봉태규의 이미지와 저 철학적 제목 사이의 간극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솔직하면서도 간결한 문체가 신선하다.

책으로 방송을 만드는 나는 그에게 출연을 섭외하기로 했다. 드디어 녹화 날이다. 저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유독 설렌다. 지극히 봉태규스러웠던 그 첫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

“교양프로그램은 처음이네요.”

조금은 긴장한 듯 머쓱한 표정의 그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이 청량감은….’

그의 표정은 마치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는 어리숙한 미소년처럼 보인다. 시원한 그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깨끗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문체는 그의 말투와 꼭 닮았다. <개별적 자아>의 책날개에는 “저자 봉태규는 배우, 방송인. 글쓰기를 즐기며, 생각보다 글을 꽤 잘 쓴다”라고 적혀 있다. 한 줄짜리 자기소개라니.

그는 생각보다 말도 꽤 잘하는 사람이었다. 입으로 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기하는 신중함과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 말투에 나는 빠져들었다.

메뉴 이름을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 발음하다 보면 또 하나의 재미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피시 앤드 칩스, 우리나라 식으로 번역하면 ‘물고기 그리고 튀긴 감자’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음식 이름에 ‘접속어’가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피시칩스라 이름 붙였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굳이 그러고 보면 같은 이름이어도 ‘접속어’를 붙임으로써 무언가 더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에 접속어를 넣으면 ‘평양 그리고 냉면’이 된다. 어쩐지 바람 부는 창 밖을 내다봐야 할 것 같다. <봉태규, 개별적 자아 中 p42~43>


마냥 철없는 소년과 같은 이미지의 배우. 그런데 그는 어느 새 한 가정의 가장이 돼 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라고 했다. 나는 가족에 대한 그의 가치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가족을 통해 인생을 배워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통과의례를 맞아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말이다.

“살면서 주위의 복잡한 것들과 함께 제가 갖고 있는 별로인 점도 함께 덜어내고 있습니다.”

곧 이어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내 프로그램은 녹화로 진행되니 얼마든지 허용되는 침묵이었다. 저 침묵을 어떻게 영상으로 담아낼지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 편집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음… 아버지의 벌이가 넉넉하지 못해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오롯이 가족들의 하소연만 묵묵하게 들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돼 보니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을 때 현실에서 1㎝쯤 붕 뜬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즘 아버지의 시선이 제게 보일 때가 있어요.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집에서 아버지가 앉았던 식탁에 앉아, 아버지가 혼자 식사를 하셨던 그 시간에 아버지가 바라봤을 거실의 텅 빈 모습과 창가의 쓸쓸함을 봤습니다. 그때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지요. 그 때 분명히 저와 함께 살고 계셨었는데 그땐 몰랐던 아버지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느껴졌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똑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어서, 살아계실 때 잘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벌을 받는 느낌이에요.”

그날의 녹화에서 그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MC가 물었다.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tbs TV책방 북소리>에 출연해 아들에 물려주고 싶은 세상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답변을 고민하는 봉태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복지시설이 생겨요. 그 복지시설 때문에 집값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복지시설의 아이들과 시하가 같은 놀이터에서 놀면 좋겠어요. 이걸 우리 아이가 다르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은 평등한 사회입니다. 적어도 우리 아이가 서열을 따지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 아이가 서열을 따지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봉태규.

녹화가 끝나고 그를 돌려보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자신의 별로인 점을 차분하게 덜어내고 있다는 그의 목소리가 계속 환청이 돼 귓가에서 맴돌았다.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날마다 조금씩 괜찮은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며, 그렇게 날마다 인생을 배우는 중이라던 그의 말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오늘 그에게 기막히도록 담백한 인생의 맛을 배웠다. 마치 한 그릇 평양냉면 같은 책, 봉태규의 <개별적 자아>의 일독을 권한다.

역대 가장 겸손한 저자 사인 현장? 녹화 후 MC들에게 사인해 주는 봉태규의 모습 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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