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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민의 소도마을 신농일기] 삶을 여는 용기

달맞이, 120x150㎝, 한지에 채색, 2015

꿈에 거대한 폭풍이 왔다. 그래서 밤새 폭풍을 버티고 깨어 보니, 막상 창문으로 들이친 것은 여름 해였다. 해의 숨은 멎어 있어 가만히 보고 있기가 좋았다. 창밖으로는 왠지 동물은 굶기고 식물에게 사명을 다해 물을 주는 옆집 할머니가 개 짖는 소리만은 버티고 계셨다. 아직은 잠이 덜 깬 채 물을 마시려고 주방에 들어가다가 순간 뭔가를 밟고 너무 아파 쳐다보니 까슬까슬하게 마른 밥알 몇 알 덩어리가 있었다. 어제는 내 허기를 채워 주었지만 오늘은 상처로 올 수 있는 그런 사소한 일이었다.

아이가 험난한 세상을 두려움 없이 잘 헤쳐 나가길 바라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엄마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 말을 참 잘 듣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경쟁률이 높은 유치원에 들어갔고 순탄하게 명문대학 진학과 졸업을 했으며, 없는 형편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이제 뒷바라지가 끝났나 싶은 엄마에게 아이는 “엄마, 다음에는 뭐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정답이라고 오해하는 인생의 방식을 전해 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성이 있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법 말이다.

‘세상 모르게’라는 것. 달게 자고 있는 사람을 보면 ‘세상모르게 잔다’고 한다. 꾸밈이나 거짓 없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상황을 보면 웬만해서는 깨우고 싶지 않다. ‘은연중에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나 보다. 하긴 너무나 낙천적인 나도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고통과 싸워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오히려 안정됐다.

‘생애’라는 말에는 엄청난 무게와 박력이 있다. 생애를 엮어 갈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심장이 도근거리고, 또 반사적으로 심장이 도근거릴 때면, 생애를 엮어 갈 궁리도 하게 됐다. 모든 생애가 가진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귀하다.

무슨 일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생 때인가, 내가 속상해 엉엉 울고 드디어 울음을 그쳤을 때, 외할머니가 말씀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이제 다 울었니, 잘 울었다. 눈물은 마음에 좋은 거야. 산다는 건 그런 것이란다. 넘어지지 않으려 뒷걸음치다가 개똥 위로도 자빠지고,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려다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말이야.

근데 앞으로는 괜찮을 거라는 말은 쉽게 해줄 수가 없구나. 앞으로 더한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아마 이 다음도 그럴까 봐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힐 테니 말이야. 살다 보면 불행하게도 더 힘든 순간이 올지도 몰라. 세상의 어려운 일은 지긋지긋하게도 그 모양이 바뀌며 계속되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얼마든지 각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전수민은?

전수민은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그린다. 전통한지와 우리 재료 특히 옻칠을 이용해 우리 정서와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한국 화가다. 한국은 물론 미국 워싱턴 D.C. 한국 문화원, 프랑스 아리랑 갤러리, 이탈리아 베네치아 레지던스, 중국 생활미학 전시관 등의 초대전을 비롯한 16회의 개인전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 현 미술관, 프랑스 숄레 등의 단체전 90여 회, 각종 해외 아트 페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직 듣지 못한 풍경>(2012), <일월산수도>(2013),<일월산수도-피어나다>(2014),<일월연화도>(2015) (2016), <일월부신도>(2017), <일월초충도>(2018), <일월모란도>(2018)등이 있다.

현재 화천소도마을 대안학교 ‘신농학당’의 교장으로도 근무하고 있다. 또한 그림 수필집 <이토록 환해서 그리운>(2016)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2017)>을 출간했다.

■오늘의 그림은?

늘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었어요. 기다릴수록 매일의 오후가 길어지고, 구름의 그림자도 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어른들이 ‘세월만큼 빠른 것은 없다’ 하시기에 시간이란 늘 부족할 줄 알았는데, 언제나 시간은 천천히 움직였지요. 드디어 시간을 잊기에 골몰했고, 그래서 해를 가두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아이는 햇볕을 머금은 모래나 잔뜩 퍼 왔지요.

(세월은) 그쯤에서 시작하여 노래를 불렀어요. 영원한 숫자가, 날짜가, 보는 건 어려워도 들리는 소리들이, 모든 것이, 빛나고 부서지던.

(※달맞이: 음력 정월대보름날 또는 팔월 보름날 저녁에 산이나 들에 나가 달이 뜨기를 기다려 맞이하는 일. 달을 보고 소원을 빌기도 하고, 달빛에 따라 1년 농사를 미리 점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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