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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민의 소도마을 신농일기] 달빛 길어 올리기

한지라고 생각한 첫 종이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서예 시간이라 문방구에서 길고 둥글게 말려 있는 화선지를 샀다. 문진으로 화선지 끝을 고정하고 벼루에 먹을 갈아 한 일(一) 자부터 날일(日) 자를 쓰다가, 자음과 모음, 그러다 고학년이 돼 ‘우리나라 대한민국’ 글자를 썼던 기억이 난다. 우리 모두 그런 종이가 ‘한지’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제대로 우리 종이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바스락거리지만 찢어지지는 않는 얇아도 견고한 한지를 만났을 때, 시중에 파는 ‘한지’라고 하는 모든 종이가 다 ‘전통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종이는 언어와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매개체로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와 역사를 연결해 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그 나라의 ‘종이’는 너무 중요한 의미다. ‘한지(韓紙)’를 ‘한국의 종이’라는 뜻으로 봤을 때, 시중에 유통되는 한지는 중국지가 훨씬 많은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개가 까마득하게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전통한지를 쓸 수는 없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지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의 껍질을 원료로 하여 뜬다. 질기고 오래가서 무려 1000년이 넘어도 변색이나 훼손이 되지 않고, 촉감이 부드럽고 통기성과 보온성이 뛰어나다. 닥나무와 삼지닥나무를 다발로 묶어 물을 부은 가마솥에 세우고 가마니로 둘러싼 뒤 불을 때어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질 정도로 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말린다. 말린 껍질을 다시 물에 불린 뒤 겉피를 긁어내어 백피를 만든다. 백피를 잿물에 넣고 3시간 이상 삶은 후 방망이로 두들겨 닥섬유를 만든다. 닥풀(황촉규) 뿌리를 으깨어 짜낸 물을 닥섬유와 함께 물에 넣고 우리 고유의 한지 뜨기 방법인 외발(흘림 뜨기)로 종이를 뜬다. 여러 장이 떠지면 압축기를 이용해 물을 짜낸 후 건조한다. 건조 후 밀도를 높이기 위해 종이를 두드리는 ‘도침’을 한다.

전통한지는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반면 공급이 적고 수요 또한 많지 않아서 보통 종이에 비해 비싼 편이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전통한지 공방이 점점 문을 닫아 몇 곳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전통한지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욱 그 우수성이 입증돼 201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이 문화재 복원지로 한지를 선택한 사례도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문화재 복원 시장을 사실상 독점해 온 일본 화지(和紙)의 아성을 한지가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고유 한지의 우수성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두루마리로 발견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인쇄물의 지질은 닥종이로, 자그마치 1300년 남짓 그 형체를 오롯이 유지하고 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라도 ‘전통한지’를 제대로 가르치려고 한지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찾아보고 도서관 자료도 열람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한지를 뜨는 공방에도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아이들은 일제히 “정말이에요?”라고 묻는다.

한지와 관련된 영화로는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2010)가 있다.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달빛이 어우러진 광활한 평야, 맑은 물, 수려한 풍광을 빼어난 영상미로 담아내며, 한지의 제작 과정을 묵묵히 보여준다. 특히 영화의 백미는 물에 비친 달빛에 취해 발로 종이를 걸러내는 한지 제조 과정을 ‘선녀들이 달빛 아래 춤을 추며 내려오듯 폭포수가 기암을 타고 쏟아져 내려 푸른 담소를 이룬다’는 계곡에서 재현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무너지는 이 사회의 귀퉁이를 끝까지 떠받치게 될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에 나오는 이규보의 시 ‘영정중월(詠井中月)’는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꿈꾸는 낭만주의적 현실을 노래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산속에 사는 스님 /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어갔다가 / 달도 함께 담았네 /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현재 화천소도마을 대안학교 ‘신농학당’의 교장으로도 근무하고 있다. 또한 그림 수필집 <이토록 환해서 그리운>(2016)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2017)을 출간했다.

<달빛 길어 올리기>, 45x120㎝, 한지에 수묵 채색

■ 오늘의 그림은?

한국 전통 민화의 ‘연화도’는 자손번창의 상징으로 연밥 속에 든 씨앗의 수만큼 많은 아들을 잉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화도는 연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한 줄기의 연꽃을 그리면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연꽃이 무더기로 자라나 있는 그림은 개업을 축하하고 번창하기를 축원하는 것이며, 연밥이 들어 있는 송이를 포함한 연꽃을 그리면 귀한 아들을 빨리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된다. 연꽃이 어떠한 소재와 짝을 짓느냐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변한다. 연꽃과 물고기가 그려지면 해마다 넉넉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까치가 연밥 위에 내려앉아 연씨를 쪼아먹는 그림은 과거시험에 잇달아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연꽃·백로·갈대가 어우러진 그림 또한 연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기를 축원하는 의미다. 제비가 연꽃 위를 나는 그림에는 천하가 태평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나비는 암수가 함께 있으면 ‘부부의 화합’과 ‘기쁨’을 상징하고, 나비가 애벌레에서 아름다운 나비로 변화하듯 ‘변화’라는 의미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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