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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민의 소도마을 신농일기] 추석, 달은 삶이고 목숨이다

일월연화도, 120x150㎝, 한지에 채색, 2018

아주 맑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렇다 할 인상이 없는 날씨였다. 나에게는 가끔 극도의 평안을 느끼고 싶어 어떤 사건이라도 겪고 싶은 기분이 있다. 식욕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렇다고 뭐든 몹시 하기 싫은 것도 아닐 때. 기력이 없는 것 같다가도 또 이만하면 건강한 것 같다가, 늙은 것 같다가도 아직 어린 것 같을 때. 스스로 무능력한 것 같다가도 유능한 사람인 것 같고, 우울한 것 같다가도 딱히 슬픈 일은 없어서 기분이 어떤지 모르는 얼떨떨한 그런 상태였다. 나는 어떤 다급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생기면 그것이 해결된 직후에 오는 해방감 같은, 확실한 기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가늠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배탈을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만약 정체되는 버스 안에서 설사라도 만나면 그것을 해결한 직후야말로 정말이지 살 것 같지 않은가.

명절이란 내게 ‘생존의 전쟁’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는 제사가 1년에 아홉 번 있는 데다 추석과 설, 정월대보름에도 어김없이 음식을 해내야 했기에 맏며느리인 엄마의 고충은 1년 열두 달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크면서 돕는다고 도왔으나 해도 해도 끝이 없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그 사실만으로도 무겁고 고단한 것이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결국 지켜보는 것도 포기하고 저만치 떨어져 나가서는 명절에는 오히려 고향에 가지 않고 또 다른 부담으로 살았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향 가는 버스를 탔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었다.

버스 안에서 자다 깼는데 커튼이 다 쳐진 버스에서 하필이면 내 얼굴에만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때문에 깬 것 같은데, 비몽사몽 간에 바깥 풍경이 알록달록 단풍인 줄 알았다.

고향에 도착한 밤, 친구들을 만나러 골목을 올라가는데 다섯 살의 내가 성큼성큼 어른이 되고 있었다. 지나온 수많은 명절이 떠올랐다. 왜 꼭 집집마다 마음을 후벼파는, 명절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밉상 고모나 이종사촌이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명절을 위한 악당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맞서 미운 소리를 내고 싶지만, 젓가락으로 엄한 송편 옆구리만 몇 번 쿡쿡 찔렀다.

친구들과 전어구이를 먹으러 갔다. 친구들 대개가 집 나온 며느리들이어서 분위기가 딱 좋았다. 명절 음식을 장만하기도 전에 집을 나왔다면 더 금상첨화였겠지만 말이다. 친구들과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구이’를 먹자며 웃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전어구이 냄새가 나도 명절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달빛이 가장 예쁘다는 추석 밤이었다. 달은 집도 옷도 없는데 저리도 밝고 온화하게 떠 있었다. 너도 나도 소원을 빌어도 되는 너그러운 달. 계절이 집이 되고, 구름이 옷인 달은 나를 고향의 골목과 어울리게 하고 녹아들게 했다.

살아서 달만큼 완벽하게 원형을 갖춘 것이 또 있을까. 달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가득 차 있었다. 달이 가득 찬 밤이면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던 할머니와 엄마가 떠올랐다. 기운 것이 차고 모자라는 것이 꽉 차 오르고 있는 것은 매번 뭉클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곧 달의 숨이 빠져나가겠지. 하지만 달은 기욺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 참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달은 연속적이고 동시에 반복적이다. 그것은 생명의 점차적인 성장과도 같은 것이다. 달의 주기와 바다의 조수가, 여성의 주기가, 달과 물과 여성이 더불어서 생명력 상징의 삼위일체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듯하다.

우리에게는 달을 좇아 이루어 나가던 삶이 있었고 또 목숨이 있었다. 달은 맥박이고 소망이다. 가난하거나 가난하지 않거나 세상의 모든 우리가 누려온 달은 삶이고 목숨이다.

■전수민은?

전수민은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그린다. 전통한지와 우리 재료 특히 옻칠을 이용해 우리 정서와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한국 화가다. 한국은 물론 미국 워싱턴 D.C. 한국 문화원, 프랑스 아리랑 갤러리, 이탈리아 베네치아 레지던스, 중국 생활미학 전시관 등의 초대전을 비롯한 16회의 개인전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 현 미술관, 프랑스 숄레 등의 단체전 90여 회, 각종 해외 아트 페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직 듣지 못한 풍경>(2012), <일월산수도>(2013), <일월산수도-피어나다>(2014), <일월연화도>(2015) (2016), <일월부신도>(2017), <일월초충도>(2018), <일월모란도>(2018)등이 있다.

현재 화천소도마을 대안학교 ‘신농학당’의 교장으로도 근무하고 있다. 또한 그림 수필집 <이토록 환해서 그리운>(2016)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2017)을 출간했다.

■오늘의 그림은?

‘일월연화도(日月蓮花圖)’는 ‘해와 달이 있는 한국의 연꽃 풍경화’다. 해와 달은 천지간 만물을 지배하는 진리, 즉 천리(天理)를 말한다. 음양을 천지로 하고, 일월로 하고, 또 내(內)에서는 부모로 하고, 남녀로 하고, 부부로 한다. 음양이 협력해 비로소 천지가 되고 일월이 창성되고 기(氣)가 응집해 삼라만상을 이루게 된다. 남녀와 음양은 원래 선후의 분별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의 생로병사도 이와 다를 것이 없어서 일견 흐트러짐 가운데도 엄연히 규범이 있고 부족한 것 같으면서 만족하며 구석이 없는 것 같으면서 구석이 있고, 어두운 것 같으면서 밝고, 물러서는 것 같으면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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