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10일 아침이었다. 히어로즈는 김시진 전임 감독의 후임으로 염경엽 코치를 새 감독으로 선임한다는 사실을 깜짝 발표했다.
염 감독은 인터뷰에서 “프로야구 감독이라는 자리는 천운이 있어야 맡을 수 있다는데 기회를 주신 구단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모두가 놀란 인사였다.
당시 염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직을 꿈꾸지는 않았다. 코치 시절의 막연한 바람이었을지 모르지만, 훗날 야구단 고위직에 오른다면 감독보다는 단장이 가까울 것으로 여겼다. 염 감독은 코치 경력을 쌓기 이전, 현대와 LG 구단에서 일하며 프런트로 먼저 부각된 인물이었다.
염 감독이 정작 단장이 된 것은 히어로즈 감독으로 4시즌을 보낸 뒤인 2017년이었다. 스스로 지휘봉을 놓고 숨고르기를 한 뒤 SK 단장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중의 시야에 ‘야구인 염경엽’은 감독 이미지에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몇몇 구단 감독직에 틈이 보이면 후보군에 단골로 등장했다. 지난 2년간 SK를 지휘한 트레이 힐만 감독 후임으로 염 감독이 바통을 받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나돈지 오래이기도 했다. 염 감독의 ‘이력서’에는 히어로즈를 4년 연속 가을야구로 이끌며 강팀 반열에 올려놓은 과정이 담겨있다. 이는 염 감독의 자랑스런 ‘스펙’이자 배경이다. 염 감독 본인은 그 중 2014년 삼성에 불과 반게임 차 뒤진 2위로 페넌트레이스를 마친 뒤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친 것을 두고두고 아파했다.
염 감독은 그렇게 기약 없이 기다렸을지 모를 때를 참 묘한 상황에서 만났다. 힐만 감독이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며 그 앞에 감독 자리가 다시 찾아왔다.
한편으로 고약한 운명이다. 3년 25억원의 최고 대우. 2년 총 8억원에 히어로즈 감독을 첫 맡았을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영광이 따르지만, 상상 이상의 부담도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염 감독은 KBO리그 최초로 디펜딩 챔피언 팀의 새 감독이 됐다.
SK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두산에 무려 14.5게임 차 뒤진 2위였지만, 한국시리즈의 주인공이 됐다. 야구 역사는 한국시리즈 우승팀을 먼저 기억한다.
준우승 팀 감독이 바뀐 적은 몇 차례 있었다. 2002년 김성근 LG 감독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뒤 경질됐고, 2010년 선동열 삼성 감독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뒤 해임됐다. 2013년에는 김진욱 두산 감독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뒤 팀을 떠나야 했다.
이 중 선동열 감독 후임인 류중일 감독만이 2011년 우승을 발판으로 롱런했고 김성근 감독 후임이던 2003년의 이광환 감독, 김진욱 감독 후임이던 2014년의 송일수 감독은 한 시즌만에 타의에 의해 지휘봉을 놓아야 했다. 두 감독 모두 앞선 시즌이 만든 ‘비교의 프레임’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했다.
SK는 지금 우승 인사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SK 관계자들 대부분이 행복에 젖어있을 때이지만, 염 감독만은 “그저 좋을 수만은 없다”고 무거운 책임감을 숨기지 않는다.
염 감독의 운명은 일면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처럼 처절하게 찾아왔다. ‘다다다다’ 울리는 천둥 소리로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곡의 도입부처럼 KBO리그에 전례 없는 상황의 감독직이 그 앞에 운명처럼 뚝 떨어졌다. 베토벤은 교향곡을 청각 상실 상태로 만들었다. 곡의 별칭은 운명이지만, 작곡가는 오히려 명작을 통해 운명을 극복했다.
염 감독은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니 피할 수 없이 싸워야 했는지 모른다. 염 감독은 3각 트레이드를 통해 김동엽을 내주고 히어로즈 시절 제자 고종욱을 영입하며 운명 극복의 첫 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