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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야구 파업의 역사…파업이 만든 시스템 재정비

야구 산업이 흔들릴 때마다 선수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파업을 통해 야구는 시스템을 재정비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며 발전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파업은 1972년 4월에 이뤄졌다. 13일의 파업 끝에 선수들은 연봉조정제도를 공식화했다. 이후 파업과 직장폐쇄가 반복됐다. 마지막 파업은 1994년부터 1995년초까지 이어졌다. 역대 4번째 파업이었고 8월13일 파업에 돌입해 이듬해 4월3일 새 시즌 경기가 열릴 때까지 계속됐다. 1994시즌은 월드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못했다. 1995시즌 역시 팀당 144경기만 치러졌다.

美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파업이 계속되던 1994년 8월 뉴욕 양키스 구장에서 한 어린이 야구팬이 아버지와함께 ‘야구를 안하면 공부도 안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네이버 옛날사진

1994년 파업은 구단들의 ‘샐러리캡’ 제도 도입 시도가 이유였다. 구단들은 빅 마켓 팀과 스몰 마켓 팀 사이의 전력 균형을 만들기 위해 ‘수익 분배 시스템’을 만들고 구단의 총연봉을 제한하는 ‘샐러리캡’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샐러리캡 제도와 함께 연봉조정제도 폐지도 구단안에 포함됐다. 구단들은 대신 선수노조에게 FA 자격 취득 연한 6년에서 4년으로 축소, 최저연봉 인상 등의 ‘당근’을 제안했다. 선수노조가 이를 거부해 결국 파업에 이르렀다.

구단측은 1995 시즌을 앞두고 ‘대체선수’들로 새 시즌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선수노조는 40인로스터 내 선수만 해당되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있지 않은 선수들로 시즌을 치르겠다는 계산이었다. 이 역시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디트로이트의 스파키 앤더슨 감독은 “대체 선수들이 뛰는 팀의 감독을 맡을 수 없다”며 감독 역할을 거부했다.

연방 정부의 적극적 개입 속에 1995년 4월3일 파업이 해제됐다. 1994년 메이저리그의 파업은 구단과 노조 모두 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관중수 급감으로 이어졌다. 스몰 마켓 팀이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결국 재정 악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리그에서 사라졌고, 워싱턴 내셔널스로 재창단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의 파업은 결과적으로 메이저리그 산업에 있어 일종의 ‘구조조정’을 가져왔고, 이후 메이저리그 고성장의 발판이 됐다.

일본 프로야구의 유일한 파업은 2004년 9월18~19일 이틀 동안 이뤄졌다. 긴테쓰 버팔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의 합병과 요미우리 주도의 8~10개 구단 단일리그 추진이 문제가 됐다. 일본프로야구 선수협회는 합병 논의가 알려진 7월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합병 반대 가처분 신청을 내는 것은 물론 선수 총회를 통해 그동안 갖고 있지 않던 ‘파업권’을 결의했다. 선수들은 파업 이틀 동안 자발적 사인회를 여는 등 팬들에게 다가갔고, 팬들은 적극적 지지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당시 선수회장을 맡고 있던 후루타 아쓰야가 TV 생방송에 출연해 팬들의 격려 팩스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당시 파업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일본프로야구는 파업 이후 라쿠텐의 창단 등으로 12개 구단 체제를 유지한 것은 물론 과거 기형적이었던 여러 시스템을 정비하는 결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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