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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민용의 ‘살아 있구나, 강원 전통시장’] ‘명품 건어물’ 수북한 주문진건어물시장

주문진전통시장 입구. 엄민용 기자

강원도는 한반도 내륙의 섬이다. 험준한 지형에 갇혀 있고, 남북의 대립으로 많은 제약도 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여러 면에서 발전이 더뎠다. 하지만 강원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조짐이다. ‘통일의 훈풍’ 속에 강원도가 남북교류의 거점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그동안 낙후돼 있던 강원도가 남북 경제교류를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시점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도 높다. 준비해야 할 것 역시 적지 않다. 이에 <스포츠경향>은 연중기획 <엄민용의 ‘살아 있구나, 강원 전통시장’>을 마련했다. 강원도의 수많은 시장을 소개하고, 그곳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그 여덟 번째 순서는 ‘주문진전통시장’이다.

주문진수산시장(주문진건어물시장) 입구의 지붕에는 귀신고래 조형물이 올려져 있다. 우리 바다에서 모습을 감춘 귀신고래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시장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엄민용 기자

주문진항을 지척에 두고 해안도로를 따라 동해안 관광객의 발길을 붙드는 시장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주문진전통시장’이다. 주문진전통시장은 농산물과 공산품 등 온갖 것들을 파는 일반적 재래시장인 ‘중앙시장’과 수산물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수산시장’으로 나뉜다. 그리고 수산시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건어물시장’과 싱싱한 먹거리들이 차고 넘치는 ‘회센터’로 다시 갈린다.

이중 시장의 중심은 단연 ‘건어물시장’이다. 근 60개에 이르는 점포가 밀집해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건어물시장’은 강릉의 색다른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문진전통시장’은 ‘주문진수산시장’으로, ‘주문진수산시장’은 다시 ‘주문진건어물시장’으로 불린다. 다른 세 이름이 같은 이름인 셈이다.

주문진건어물시장 사람들은 ‘건어물만은 주문진 것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엄민용 기자
한 상점의 모습. 엄민용 기자
주문진건어물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코다리·황태·먹태 등 명태와 관련한 것이다. 엄민용 기자
말린 가오리가 문득 막걸리 한잔을 떠올리게 한다. 엄민용 기자

오래전부터 부산과 원산 사이를 운항하는 화물선의 하역지 역할을 해온 주문진은 강릉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항의 기능도 수행해 왔다. 이와 함께 한류와 난류가 합류하던 곳으로 다양한 어장이 형성돼 어업전진기지로 발전한 곳이다. 이 때문에 광복 이전부터 주문진항 가까이 종합시장이 들어섰고, 이 시장은 오랫동안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가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청정 동해의 수산물과 건어물에 대한 수요가 커졌고, 이들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형성됐다. 이후 10여년 전 지금의 해안도로가 나면서 기존 상인들이 도로 양옆으로 점포를 이주해 현재의 시장을 형성했다.

홍기석 주문진건어물시장 상인회 회장이 건어물시장의 옛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려주고 있다. 엄민용 기자

이 시장 입구 위쪽에는 대형 고래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계 귀신고래’다. ‘쇠고래’ 또는 ‘회색고래’로도 불리는 귀신고래는 몸무게가 36톤까지 자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래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문진 일대에서 많이 잡혔으나 1970년대부터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귀신고래가 다시 돌아오기를 염원하면서 이 시장의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2009년 시장 입구에 조형물을 설치했다.

주문진건어물시장 상인회 사람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보도에 거리의 전광판처럼 다양한 조명의 불빛을 깔아 밤마실 나온 사람들에게 걷는 재미를 선물하고 싶어 한다. 엄민용 기자
건어물시장이라고 해서 건어물만 파는 게 아니다. 대게 등을 찾는 손님도 많다. 엄민용 기자
건어물시장이라고 해서 건어물만 파는 게 아니다. 인근 바다에서 잡힌 싱싱한 생선들도 많이 팔고 있으며, 이들을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는 회센터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엄민용 기자
건어물과 젓갈 등을 판매하는 건어물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 엄민용 기자

당시의 바람대로 현재 건어물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관광철은 물론이고 비수기에도 시장이 사람들로 넘쳐난다. 건어물시장으로 사람이 몰리니, 이곳에 함께 자리한 회센터에도 사람이 붐빈다. 대게집·생선구이집·튀김가게 등 시장 곳곳에 자리한 맛집들 또한 장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 전체가 왁자하고 활기가 넘친다.

시장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정직’이다. 이곳 상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상품 품질만은 주문진 것이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손님이 불만을 가지면 기꺼이 반품·환불해 준다. 손님들이 꾸준히 믿고 찾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직’보다 더 효과적인 비결은 ‘공부’다. 시장 상인들이 상인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예를 들어 최근에는 다시마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다시마가 왜 좋고 어디에 좋은지를 장사꾼이 알아야 손님들께 제대로 설명하고 권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주문진건어물시장 점포 간판들에는 동향 사람들의 눈을 붙잡으려는 듯 여러 지역명이 적혀 있다. 엄민용 기자

이렇다 보니 이곳 상인들은 너나없이 건어물 박사다. 두뇌계발과 성장발육에 효과가 있는 것은 물론 암세포 증식 억제에도 효능이 있다는 건어물을 어떻게 해서 먹는 게 좀 더 맛있고, 몸에 좋은지를 척척 들려준다. 건어물을 보고만 있어도 입에 군침이 도는데, 몸에도 좋다는 자랑을 한껏 늘어놓으니 손님들로서는 지갑을 열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상인회(회장 홍기석) 중심으로 꾸준히 변화를 모색한다. 시장 한쪽에 ‘즉석 라면집’ 개장을 꿈꾸는 것도 한 사례다. 시장에서 파는 다양한 수산물을 이용해 손님들이 직접 라면을 끓여 먹는 ‘체험형 맛집’을 오픈하면 손님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 건어물과 찰떡궁합인 간장·고추장 등 각종 장류를 파는 가게를 유치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아직은 구상 단계이지만, 상인회 측은 수산시장을 단순히 건어물과 수산물만 파는 곳이 아니라 강원도를 대표하는 ‘먹거리타운’으로 탈바꿈하려 하고 있다.

건어물시장을 벗어나면 바로 주문진항이 보인다. 엄민용 기자

이와 함께 현재 점포들이 늘어선 길 양편 보도를 ‘빛의 길’로 만드는 일도 추진할 요량이다. 밤이면 길바닥에 다양한 수산물과 강릉의 관광명소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 사람들에게 걷는 재미를 선물하겠다는 것.

강릉시도 상인들의 이러한 노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담당 공무원들은 시장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상인들과 머리를 맞댄다.

전통 재래시장인 종합시장 입구.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손님들은 없고, 썰렁한 분위기만 풍긴다. 엄민용 기자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이곳에도 ‘아픈’ 구석이 있다. 수산시장과 붙어 있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로변 수산시장의 안쪽에 자리한 ‘중앙시장’이다. 강릉과 인근 지역의 농산물뿐 아니라 일상에서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판매하는 재래시장인 이곳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40~50개 가게 사이에 썰렁한 바람만 분다.

종합시장의 한 점포 앞에 놓은 말린 야채들. 엄민용 기자

이곳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시장 가운데에 공터가 있을 때만 해도 그곳에서 음식을 파는 난전들이 있었고, 여기로 사람이 몰리면서 시장이 꽤 활기 넘쳤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옛 기억이다. 하지만 공터에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이 모이던 공간이 사라지면서 시장 전체가 활력을 잃고 말았다. 시장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먹고 사는 공간임을 새삼 일깨워 주는 사례가 이곳 중앙시장의 쇠락이다.

‘봄’ 하면 떠오르는 달래도 나와 있다. 엄민용 기자

한편 강릉시는 쇠약해진 중앙시장을 되살리는 활성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 상인들의 희생과 적극적인 참여가 우선돼야 한다. 인접한 수산시장이 보여주듯이 재래시장 활성화의 주축은 시장을 지키는 상인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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