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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의 스포츠gogo학] ‘불멸의 혼’ 손기정, 그가 남긴 유물과 정신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 기념공원에 세워진 손기정 동상. 머리엔 월계관, 가슴에는 태극기를 달고, 그리스 청동투구를 든채 고개를 당당히 든 ‘대한민국 청년’ 손기정을 의미한다. 김경호 선임기자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 기념공원에 가면 가슴 한복판에 태극기를 달고, 월계관을 쓴 채 당당히 고개를 든 ‘대한민국 청년’ 손기정(1912~2002)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의 두 손에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된 부상품인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들려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8월 9일, 식민지 청년 손기정은 인류 최고의 제전인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신기록으로 우승하고도 시상식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본국기가 올라가고 기미가요가 울려퍼질 때 손기정은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 화분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국기를 향하고 있는 2위 어네스트 하퍼(영국)와 달리 고개를 숙인채 침울한 표정을 짓는 1위 손기정, 3위 남승룡의 시상식 장면은 나라잃은 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동상으로 만날 수 있는 대한민국 청년 손기정은 우리에게 국가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국가 없이 고개를 들 수 있는 국민은 없다. 올림픽 제패 후 50년 만에 그의 손으로 돌아온 그리스 청동투구는 국력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세계를 상대로 한민족 최초의 승리 기록을 쓴 손기정은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니다. 일본인이 24년에 걸친 도전에서 이루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을 조선청년이 해냈다는 사실에 위축돼 있던 민족의 자긍심이 살아났고,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농촌 계몽운동가 심훈은 조선중앙일보 호외에 게재한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손은 /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 이역의 하늘 아래서 /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 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중략)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민족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했다. 겨레의 혼을 일깨워주는 이 글로 심훈은 일본경찰에 불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민족의 울분을 표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족 자주정신을 부추겼다는 이유에서다.

손기정은 베를린 마라톤 우승 이후 유럽을 여행할 때 사인요청을 받으면 언제나 한글 이름을 써주며 한국인을 명시했다. 손기정 기념관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집에서 열린 베를린 교민 축하행사에서 태극기를 보고 감명받은 손기정은 이후 모든 행사에서 한글 이름으로 서명하고, ‘KOREA’와 한반도 지도를 그려넣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강조했다. 우승 인터뷰에서도 그는 한국인임을 강조했지만 독일 언론에 그의 외침은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일제는 손기정이 민족운동의 발화점이 될 것을 두려워해 귀국 이후 그를 철저히 감시하고 경계했다.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을 때, 환영나온 인파를 제재하고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마치 중죄인을 체포해 가는 듯한 장면은 당시의 심각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슬픈 현실을 올림픽의 꽃 마라톤 우승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와 행정가로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그는 이제 역사 속의 인물이 됐다. 그가 남긴 스포츠 유물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관과 월계수, 금메달, 상장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커지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재산이다.

손기정의 머리에 씌워졌던 월계관을 비롯해 금메달, 우승상장은 공원내 손기정 기념재단에 전시돼 관람객을 맞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 3점을 2012년 4월 등록문화재 제489호로 지정했다. 전쟁과 인생의 풍파를 거치면서도 손기정은 그와 관련된 기념품과 각종 서류를 소실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했다.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등록문화재489호). 은과 구리 성분의 이 메달 앞면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올리브관과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는 조각이 있다. 손기정 기념재단

지름 5.5㎝, 무게 73.15g인 금메달은 은과 구리가 주성분으로 금과 니켈도 섞여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앞면에 ‘ⅩⅠ OLYMPIADE BERLIN 1936’이라고 명시돼 있고 승리의 여신 니케가 올리브관과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다. 뒷면에는 마라톤 영웅을 무등 태워 환호하는 그리스 시민들의 모습이 있다. 벗겨진 금막과 곳곳에 생긴 흠은 83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시 등록문화재 조사위원을 맡은 하웅용 교수(한체대)는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체육인 뿐 아니라 불행한 역사와 비극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한국인”이라며 “그의 금메달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은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의 가치를 넘어선 대한민국의 영웅을 기리는 일”이라고 했다.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월계관(등록문화재489호). 색깔만 변했을 뿐,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잘 보존돼 있다. /손기정 기념재단

나뭇잎으로 제작된 월계관은 부식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경이로움을 더한다. 등록문화재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재우 교수(중앙대)는 “고대 올림피아제에서 기원을 둔 월계관의 수여는 신과 인간 사이의 신비로운 교섭을 의미했으며 올림픽에서 우승은 오직 신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우승자는 신의 총애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고 의미를 두며 “민족 운동사적, 체육사적 의의를 갖는 손기정 선수의 월계관으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그는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은 일제가 말살하려고 했던 우리민족이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보호받아야 할 약소 민족이 아니라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지닌 민족임을 전세계에 알린 사건이라는 점,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 의거로 이어져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상장(등록문화재489호). 손기정은 ‘JAPAN’ 이라고 되어 있는 자신의 국적표기를 떼어내고자 시도했으나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보존했다. /손기정 기념재단

손기정의 일본어 발음을 영문으로 옮긴 ‘KITEI SON, JAPAN’이 새겨진 우승 상장은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광복후 ‘JAPAN’을 도려냈다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다시 붙여넣은 흔적은 손기정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52) 손기정 기념재단 사무총장은 “금메달, 상장 등이 도난되거나 유실될 수도 있었던 위기가 수 차례 있었다”며 유물에 얽힌 여러 사연을 소개했다. 손기정의 장녀(문영)와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이창훈의 아들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손기정과 생활하며 2002년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감독으로 한국선수의 1·2·3위(함기용·송기윤·최윤칠)를 이끌고 돌아온 얼마 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도 못 가신 할아버지는 안방을 파서 기념물을 보관했다고 한다. 월계관은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주변에 숯을 깔아 보관하셨다. 한 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 많은 물건을 훔쳐갔는데 다행히 마루의 액자 속에 걸어놓았던 금메달은 가져가지 않아 안도한 적도 있다.”

1979년 UN아동의 해를 맞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는 취지로 육영재단에 메달 등 유물 1500점을 기증했던 손기정은 육영재단이 유물전시에 소홀하자 돌려달라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거부하던 육영재단의 처사로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메달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손기정 기념 재단이 2005년 설립된 후 2010년 육영재단이 핵심 유물을 돌려줌으로써 지금의 빛을 보게 됐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마라톤 시상식에서 히틀러로부터 직접 받은 월계수 화분을 국내로 들여와 모교인 양정고보 교정에 심은 월계관수. 지금은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 선 크고 웅장한 북미산 대왕참나무는 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돼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손기정이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 화분은 1937년 지금의 손기정 기념공원인 그의 모교 양정고보 뜰에 심어졌다. 이 나무는 사실 월계수가 아니고 북미산 대왕참나무이며, 손기정의 월계관도 참나무 잎으로 만들어졌다. 서울시는 1982년 이 나무를 기념물 제5호로 지정했다. 기념수 옆에는 심훈의 시 ‘오오-조선의 남아여’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손기정의 유물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밝힌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다. 이 투구는 당시 그리스의 유력 언론사인 브라디니 신문사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내건 부상품이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의 유물을 전달하는 전통은 고대 유물 해외반출이 금지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전통이었다.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 50주년인 1986년 반환돼 국가에 기증된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서구 유물로는 유일하게 국가 보물 904호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아테네 올림피아에서 발굴된 높이 21.5cm의 청동 투구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마추어 선수에게는 메달 외에 어떤 선물도 공식적으로 수여할 수 없다’는 IOC 규정 때문에 독일올림픽위원회에 남겨졌다. 1946년 이전부터 이 사실을 알게된 손기정은 끈질긴 노력 끝에 1975년 이 투구가 독일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리스의 브라디니 신문사까지 합세한 전국민적 반환 노력 끝에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인 1986년에 돌려받았다.

이준승 사무총장은 “할아버지가 투구를 받고는 ‘금메달을 또 딴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면서 “우리나라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했다면 독일은 끝까지 청동투구를 돌려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국력이 뒷받침 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손기정은 이 투구를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가에 기증했다. 1987년 서구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 904호로 지정된 이 투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77년 7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 사연을 소개하면서 “이 투구는 문화재 경매 싯가로 5만~7만 달러(2500만~3500만원)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고 가치를 전했다.

손기정 기념재단 전시실에서 일반 관람객을 맞고 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유물 3점.손기정 기념재단 이준승 사무총장이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손기정 기념재단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유물 3점(메달, 월계관, 상장)을 이 청동투구와 한 범주로 묶어 보물 수준으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준승 사무총장은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는 우리 민족 역사의 한 부분이며, 올림픽 우승이 없었다면 청동 투구와 같은 부상품도 없었다”고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제패의 의미를 강조했다.

재단은 이밖에도 보존 시설이 잘 된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사진, 서류 등 총 2만 5000여점의 유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총장은 “손기정의 유물이 국민의 자산이 될때 기념관의 존재 의미가 있고, 손기정 정신을 제대로 이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면서 “기념공원을 찾아오시는 분마다 국가의 소중함을 새삼느낀다고 한다. 이곳이 나라사랑의 성지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기정에 관한 책으로는 그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을 비롯해 2012년 대한체육회가 제1호 대한민국스포츠 영웅으로 그를 선정한 이후 펴낸 ‘불멸의 혼 손기정’(이태영), 베를린의 월계관(고두현), 겨레와 함께 뛰었다(이태영) 등이 있다.

손기정을 연구한 국내외 논문도 여러편 있으나 그가 남긴 업적과 삶의 족적, 민족사적 의미 등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마라토너 손기정의 생애와 사상’(황영조 석사논문), ‘스포츠영웅 손기정의 체육활동에 관한 역사적 재조명’(하정희 박사논문) 등 학위 논문에서는 신의주 출신 손기정이 가난한 환경을 딛고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성장해 베를린 올림픽을 제패하는 등의 생애와 그의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학술지 투고 논문도 여러편이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정찬모), ‘손기정의 민족의식 형성에 관한 연구’(손환, 하정희), ‘마라토너 손기정의 체육사적 의미’(곽형기, 이현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 미디어에 비친 손기정 연구’(허진석), ‘일본 언론 매체의 손기정 마라톤 우승보도에 나타난 민족주의’(김명권) 등도 그의 생애와 국내외에서의 평가 등을 다뤘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역사적 의미’(하정희, 손환)는 조선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시사하는 역사적 의미를 살폈으며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내용 연구’(허진석), ‘손기정 연구의 사료로서 영화 ‘올림피아’에 대한 고찰’(허진석)은 당시의 경기 내용과 사실 고증에 중점을 두었다. ‘손기정 월계수의 진실’(정성호)은 이상의 논문과 달리 월계수라고 알려진 기념수를 식물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그것이 북미산 대왕참나무라는 사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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