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북톡카톡 시즌2’의 히로인 홍선애. 그녀의 직업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다. 경제와 건강, 그리고 교양 분야가 그녀의 전문영역이다. 방송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서의 홍선애는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고지식함과 독서에 관한 한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가진, 조금 엉뚱한 청춘이기도 하다. 톡방의 주인장 김성신의 직업은 출판평론가다.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책의 흥미로움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는 늘 재미를 찾는다. 책에 관한 격 없는 수다를 서평으로 기록해 보자는 ‘북톡카톡’ 칼럼도 그의 아이디어다. 책읽기가 연애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아가씨 홍선애. 꽃중년을 자처하는 수다쟁이 아저씨 김성신. 두 사람의 즐거운 책 수다, 북톡카톡 백서른한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최현미·노신회 지음 / 혜화1117)이다.
성신:선애는 누가 제일 부러워?
선애:제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죠.
성신:현실감각이 뛰어나군. 난 누굴 부러워할 때도 비현실적인데.
선애:혹시 슈퍼맨 같은 사람이 부러우신가요?
성신:그보단 훨씬 소박하지.
선애:그럼 뭐지…?
성신:딸 가진 엄마!
선애:ㅋㅋㅋㅋㅋ 소박하면서도 매우 비현실적이네요. 선생님은 딸도 없고, 게다가 엄마가 될 수는…. 그런데 왜 부러우세요?
성신:이제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와 쉰 살이 넘은 여동생이 나누는 대화를 곁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 신기하거든.
선애:뭐가 신기하세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
성신:분명 서로 말을 하고 있는데, 가끔은 독백인지 방백인지 알기 어려운 어법으로도 서로 대화를 하더군.
선애:서로가 거의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대화라서 그럴 수 있겠지요.
성신:그런가 봐. 그런데 유독 내 여동생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어머니의 말이 있더라고.
선애:어떤 말이죠?
성신:어머니가 여동생보고 ‘너는 나잖아!’라는 식의 말을 하면, 그건 아주 싫어하더라고.
선애:아이고! 그거 세상의 모든 딸들을 가장 미치게 하는 말이죠. 아마도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마치 거대한 덫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말이에요.
성신:같지만 다르게 살고 싶은?
선애:그게 옳잖아요.
성신:맞아! 모녀관계의 바로 그 점이 부자관계와 가장 다른 점 같아. 아버지처럼 살고자 하는 아들들은 꽤 있으니까 말이야.
선애:감정적으로 훨씬 복잡하죠. 일단 여성의 삶은 여성이 만족할 만하지 않았잖아요. 그 어떤 시대에도 말이죠. 그런데 대체 어떤 책을 읽으셨기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시죠?
성신:진정으로 부러워하며 읽은 책이지.
선애:아! 엄마와 딸이 함께 쓴 책인가 보다!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을 읽으셨군요.
성신:빙고!
선애: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사랑하는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엄마와 딸이 나누는 책. 그런데 이 엄마와 딸은 전형적인 한국 모녀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저는 일단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어요.
성신:50대 초반의 지성적 면모를 가진 엄마와 20대 초반의 예술적 면모를 가진 딸이 등장하니까, 나 역시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지더군.
선애:엄마와 딸인데, 각각 지성과 예술을 상징한달까?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86세대와 N포세대의 만남과 연대의 가능성까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었어요.
성신:응. 자신들이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문학과 만화 속 소녀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내놓는 것뿐인데도, 그 이야기들이 그저 감상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더라고.
선애:엄마와 딸의 대화가 늘 그렇듯이 간극과 여백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죠. 이 책을 읽을 때는 바로 그것을 읽어야 해요. 글자가 없는 지면을….
성신:글자 없는 지면을 읽어라? 정말 기가 막히군! 암튼 이 책은 제목이며, 표지 디자인이며, 등장인물들까지, 매우 ‘소녀소녀’한 책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매우 지성적인 책이기도 해.
선애:들장미 소녀 캔디, 알프스 소녀 하이디, 말괄량이 삐삐, 소공녀의 사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이 소녀들도 독자들과 함께 성장했고, 그래서 지성적 존재들이 된 것 아닐까요?
성신:나 역시 그렇게 봐.
선애:저는 주근깨에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과 늘 함께 살고 있어요.
성신:선애와 함께 나이 들어간 빨간 머리 앤은 지금 어떤 사람이 돼 있을지 궁금하네.
선애:앞으로도 오랫동안 저를 지켜보시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성신:그러지 뭐! ^^ 암튼 난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이 굉장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선애:어떤 점에서요?
성신:얼핏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퇴행이거나 회고가 아니더라고.
선애:그건 아마도 두 저자가, 자신들이 지금 서 있는 지점과 성장에 대해 성찰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 소녀들을 통해서 말이죠.
성신:엄마와 딸이 같은 작품을 읽고 각자 다른 생각을 한 것을 적어 놓은 듯 보이지만, 사실 이 책은 끝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더라고.
선애:어떤 질문인가요?
성신:“그 소녀들처럼 우린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는가?”
선애:아! 저는 이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엄마 저자는 <피터팬>의 웬디를 떠올리며 엄마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서 소녀에게까지 현모양처를 요구했던 시대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반면에, 딸 저자는 나이도 먹지 않는 피터팬에 비해 웬디가 독립적 주체로서 성장해 가는 것에 주목하죠. 그러고 보니 둘 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네요.
성신:딸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느 백 살의 웬디가 궁금해지더군.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막연하고 환상적인 미래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고야 말겠다’라는 구체적인 의지와 희망을 볼 수 있었어.
선애:이 책 정말 처음에는 가볍게 읽었는데, 생각이 퍼져 나가는 범위가 한도 끝도 없네요.
성신:간단하지가 않지. 정말 좋은 책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먼 훗날 이 저자들이 이 책을 다시 썼으면 좋겠어.
선애:다시 써요? 어떻게요?
성신:엄마가 증조할머니가 되고, 딸도 할머니가 되고, 손녀가 다시 딸을 낳아 4대가 함께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내는 거지! 그러면서 나는 피터팬처럼 그것을 다 지켜보는 거야! 열렬히 응원하면서.
선애:ㅎㅎㅎㅎ 인정! 엄마와 딸을 부러워하실 만한 자격이 있네요!
성신:이 책을 읽다가 문득 사내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소나기>를 실컷 설명했더니, 대뜸 “그래서 걔네들이 같이 잤다는 거예요, 안 잤다는 거예요?”라고 묻던 놈이 있었지.
선애:ㅋㅋ 엄청난 친구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성신:실컷 두들겨 맞았지.
선애:애들은 그게 궁금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패기까지….
성신:그 녀석 지금은 뭐하고 사나 몰라… 별로 그립진 않지만.
선애:소녀들의 소녀들을 왜 부러워하셨는지 이제야 알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