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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미식가를 위한 ‘음식의 말’

intro

유재덕의 직업은 합법적인 칼잡이, 즉 요리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에서 20년 넘게 일했으며, 현재는 그곳에서 메뉴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요리사’보다는 자신을 ‘음식가’ 혹은 ‘파불루머’라는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음식물’이나 ‘영양물’을 뜻하고, 그래서 ‘마음의 양식’ 등을 표현하는 숙어에서 종종 활용되는 라틴어 pabulum(파불룸)에서 따온 단어다.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좌우명이다. 요리는 맛을 주지만, 음식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언제나 손에서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집어들었다. ‘파블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은 오늘도 그가 주방에서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마흔네 번째는 ‘음식의 말’(레네 레제피, 크리스 잉 지음 / 박여진 옮김 / 윌북)이다.

“미장 점검하자.”

초짜 요리사라면, 주방에서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런다면 선배 요리사들로부터 오랫동안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방에서 쓰는 ‘미장’은 불어 ‘Mise en Place(미즈 앙 플라스)’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줄여 쓴다고 해도 ‘미즈 앙’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렇게 혀를 굴려 쓰면 외국물이라도 먹은 양 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령 ‘워터’를 ‘워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다. 그래서 주방에서는 다들 겸손한(?) 발음으로 그냥 ‘미장~ 미장~’ 한다.

호텔처럼 많은 요리사들이 일을 하는 주방에서 ‘미장’은 매일 써야 하는 용어다. 호텔의 레스토랑은 영업이 시작되기 최소 15분 전까지 라인 셰프들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요리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도구 등을 정리해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이것을 뜻하는 말이 바로 ‘미장’이다. 즉 ‘주방에서의 준비 완료’를 뜻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판에서 흔히 쓰는 ‘미장센(Mise en Scene)’이라는 단어 역시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을 생각해 내고, 화면 속에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요리사들이 ‘미즈 앙 플라스’를 ‘미장’으로 발음한다고 해서 크게 부끄러울 일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나는 매일 ‘미장’을 점검해야 한다. VIP 예약이나 특별 주문 등으로 인해 특이한 식재료가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런 것들을 점검하고 주방의 청소 상태나 요리사들의 복장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레스토랑이라면 ‘미즈 앙’부터 철저히 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의학 드라마에서 외과 수술 장면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팀을 이뤄 큰 수술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긴장감을 한껏 높이려고 연출한 그 화면이 내 눈에는 주방의 미즈 앙과 똑같아 보였다. 무엇보다 가지런히 놓인 수술용 메스와 도구들, 그리고 의사가 수술용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술 직전에 손 소독을 하는 것까지 말이다. 수술실의 모습이 주방의 풍경과 너무나 흡사해서 흥미로웠다.

‘미장 점검’이 끝나면 주방은 곧바로 전투 상황에 들어간다. 쏟아져 들어오는 ‘빌지’를 보며 셰프는 큰 소리로 오더를 부른다.

“뉴 오더! 세트메뉴-A 2개, 뉴 오더! 알라 그린 아스 수프 3개, 페페로니 피자 1개 에잇 컷! 나우 픽 업.”

‘빌지’라는 말은 청구서라는 뜻의 ‘bill’에 ‘紙’(종이 지)자를 합한 일종의 주방 은어다. ‘홀에서 주방으로 보내는 요리주문서’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앞의 말을 ‘번역기’로 돌리면 ‘알라 그린 아스 수프 3개’는 ‘단품 그린 아스파라거스 수프 3인분’이고, ‘에잇 컷 나우 픽업’은 ‘8조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 즉 요리가 완성되면 바로 접시에 담아내라’는 뜻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런 음식 주문들을 호텔의 요리사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 시간에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귀와 손 동시 가동상태’다. 요리사들이 주방에서 쓰는 용어들은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힘들다.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최적화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신입의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드나’ 싶겠지만, 주방에서 사용하는 용어 몇 가지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뉴욕의 주방이나 인도의 주방이나 브라질의 주방이나 다 똑같다. 요리사는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고, 세상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있다.

최근 내가 읽은 책은 ‘음식의 말’이다. ‘모든 주방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부제가 마음에 쏙 들어서 구입한 책이다. 레네 레제피와 같은 유명 셰프부터 스타벅스 이사, 농부, 과학자, 평론가, 사회학자, 푸드 트럭 요리사까지 음식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각자의 요리 철학과 삶의 방식에 대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임’지 표지를 두 번이나 장식하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한 세계적 요리사 레네 레제피의 말은 나로서는 정말 배울 것이 많았다. “최고의 음식을 원한다면 고향을 떠나라”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면 창업하지 마라” “미식은 국경이 없다” 등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았다.

레네 레제피는 정체성이 없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요리를 세계적 경지로 끌어올린 요리사라는 평가를 얻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인 그는 덴마크로 건너간 후 오로지 북유럽에서 자라는 재료와 제철 음식으로 메뉴를 구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정된 자원이 바로 해법이 됐다고 말하는 대목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더 불편할수록, 더 제안될수록, 더 고립될수록 창의성은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는 “최고의 맛은 낯선 곳에 있다”고도 말했다. 단지 물리적으로 낯선 곳만이 아니라 생각이 낯설어지는 곳에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요리사이자 철학자였다. ‘세상에 대단한 식재료’는 없다는 그의 지론에도 극히 공감하며,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음식의 말’에는 이 밖에도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던 네팔의 한 여성이 타고난 손맛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레스토랑 오너 셰프가 된 이야기라든지, 르완다 내전으로 죽음과 함께하는 나날을 보낸 한 소년이 후일 스타벅스의 이사가 돼 최고의 커피맛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야기도 나온다. 모두 눈물이 핑 돌 만큼 감동적이다.

곧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호텔의 주방은 벌써 심정적으로는 전시상황이다. 크리스마스 시즌과 더불어 연중 가장 바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전쟁터 같은 주방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기쁘다. 추석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먹고 마시며 풍요를 기원하고 행복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다. 만드는 자의 기쁨과 감동이 없는 요리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가장 훌륭한 요리란 요리사의 즐겁고 선량한 마음까지 함께 올려진 것이 아닐까?’ ‘음식의 말’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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