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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불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 나를 건강히 지키는 집밥 ‘혼자의 가정식’

intro

유재덕의 직업은 합법적인 칼잡이, 즉 요리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에서 20년 넘게 일했으며, 현재는 그곳에서 메뉴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요리사’보다는 자신을 ‘음식가’ 혹은 ‘파불루머’라는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음식물’이나 ‘영양물’을 뜻하고, 그래서 ‘마음의 양식’ 등을 표현하는 숙어에서 종종 활용되는 라틴어 pabulum(파불룸)에서 따온 단어다.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좌우명이다. 요리는 맛을 주지만, 음식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언제나 손에서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집어들었다. ‘파블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은 오늘도 그가 주방에서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마흔일곱 번째는 ‘혼자의 가정식’(신미경 지음 / 뜻밖)이다.

젊은 시절, 바쁘고 힘이 지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면 좀 여유가 생기겠지. 그때까지만 견디자.’ 그 당시 바라보았던 나이가 50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는 요즘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바쁘다. 연초에 있었던 승진과 함께 주방에서의 책임도 막중해졌다. 여기에 졸저 ‘독서주방’의 출간이 이어졌다. 4년간이나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인 만큼 읽을 사람은 다 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저 나와 가족들에게 기념품 하나가 생기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책이 세상에 나오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책 출간 후 인터파크도서, 교보문고, 채널예스, 월간 쿨투라 11월호…. 인터뷰가 줄줄이 이어졌다. 또 EBS 라디오 ‘윤고은의 북카페’ 초대석, CBS 라디오 ‘주말엔 이봉규와’ 길 위의 초대석, 교통방송(tbs) ‘TV 책방 북소리’ 등등 방송까지 해야 했다. 처음에는 인터뷰와 방송출연을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책을 내주신 출판사 대표께는 정말 못할 짓이 되는 거였다. 책을 내고 약 한달 동안 정말이지, 말 그대로 숨 쉴 틈도 없었다. 내가 한 일이지만, 어떻게 이것을 다했나 싶다. 돌이켜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아무튼 책 홍보를 위한 일이 그럭저럭 마무리되자, 이제 호텔은 연중 최고의 시즌인 연말로 돌입했다. 정말 나에겐 끝내 주는 한 해다. 나는 지금 아플 겨를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책 출간은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일이고, 이런 사적인 일로 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단체손님 수백인분의 식사를 준비했고, 주말에도 쉴 수가 없다. 문득 젊은 날의 내가 떠올랐다. ‘나이가 들면 좀 여유가 생기겠지…’라고 했던 바로 그 시절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도 주방의 스승과 선배들은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들이 너무나 능숙했기 때문에, 내 눈에는 바쁘고 힘들게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막상 내가 그 나이에 도착해서 보니 그런 것을 좀 알겠다.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지치고 힘들 수 없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면 안 된다. 팀 전체의 의욕과 사기를 좌우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래서 책임자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나는 이제 그것도 이해한다. 나 역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잠시라도 힘든 자신을 토닥거려 줄 필요가 있다. 이는 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혼자 해결해야 한다. 이럴 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구급약품이 바로 책이다. 잠시라도 혼자가 돼 책장을 넘기노라면 바쁨과 힘듦, 그리고 시름을 털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고된 노동 끝에서 받는 한끼의 식사와도 같다.

유독 지친 오늘, 나는 나에게 혼독(?)과 혼밥을 긴급히 처방하기로 했다. 책장을 넘기며 혼자 밥을 먹고 있다가 문득 몇 달 전 만났던 정재민 전판사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를 출간한 그 유명한 작가 말이다. 그는 지금 월간지 ‘신동아’에 ‘혼밥 판사의 한끼’를 연재하고 있다. 그는 재판 후 혼밥을 하면서 법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고한다. 그는 이 칼럼에서 판사로서의 고뇌와 삶을 솔직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쓰고 있는데, 문학상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소설가답게 ‘혼밥 판사의 한끼’는 정말 재미있다. 당연히 나는 그의 팬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 지방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호텔로 찾아왔다. 내가 ‘혼밥 판사의 한끼’ 다음호의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칼럼이 ‘100년 식당의 30년 셰프’다. 그 글을 통해 나는 요라사로서의 나를 다시 보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꼈고,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설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은 이렇게 사람의 인생도 바꾼다.

정재민 전판사의 칼럼 ‘혼밥 판사의 한끼’는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며 선택한 다른 작가의 책이 있다. ‘혼자의 가정식’이다. 저자 신미경씨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이자 칼럼니스트다. 그는 혼밥을 굳이 가정식으로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선택했다.

저자는 일중독과 쇼핑중독의 무한 루프 속 삶을 살면서 건강이 나빠진 후 자신을 위한 삶과 건강에 관심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간편함을 추구하던 인스턴트 간편 식사법을 버린다. 대신 직접 부엌에서 식사 재료를 준비하며, 느리지만 건강한 집밥을 만든다. 그렇게 혼밥 식사를 스스로 만들며 건강을 되찾은 경험을 책에서 들려준다. 사진과 함께 간단한 요리법 레시피는 덤이다. 요거트와 과일을 시작으로 간편한 오픈 샌드위치와 낫토를 넣은 국수, 생일날의 미역국, 크림치즈와 꿀을 곁들인 무화과, 그리고 담백한 차까지,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담아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에게 어떤 요리를 해주면 좋을까를 종종 생각해 본다. 일종의 헌정요리 개념이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나는 신경미씨에게 초대를 받아 그가 해주는 밥상을 받고 싶었다. 책장을 넘기다가 자주 눈을 감고 저자의 식탁을 상상했다. ‘혼자의 가정식’은 진심을 담은 소박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도 너무나 편안하다.

어떤 경우에서도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혼밥은 일하기 위한 연료를 급히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잠시나마 혼자가 돼 시간을 멈추고, 가만히, 그리고 깊게 ‘자신을 존중하는 식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혼밥의 진정한 의미가 됐으면 좋겠다. 이럴 때 의미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혼밥도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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