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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역사, 몰라도 살지만 알면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도서출판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 사진제공|종로문화재단

도서출판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에게 ‘역사’는 단순히 ‘옛날옛적에’가 아니다. 많은 이의 시행착오와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든 시간의 요약본이고, 시대의 빠른 변화 앞에서도 능동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나침반이라고 확언했다.

“역사는 삶의 나침반을 캐낼 수 있는 광맥이에요. 그게 금맥이 될지 은맥이 될지, 아니면 구리맥이 될지는 본인의 주체성에 따라 달라지고요. 역사를 몰라도 잘 살 순 있죠. 하지만 역사를 알게 되면 그 안에서 삶의 질을 다르게 하는 하나의 지도를 캐낼 수 있어요.”

흰 서리가 내려앉은 머리에 깡마른 체구, 세월이 깃든 깊은 눈매부터 예사롭지 않다. 때론 날카롭게 시대의 키워드를 읊기도 하고, 때론 소녀처럼 ‘꿈’에 대해 환한 미소로 얘기하기도 한다. ‘역사’란 키워드로 책과 끈질기게 연애한, 박혜숙 대표의 이야기다.

■“사학(史學)이 체질”이라던 제주 여고생, 서울에 오다

1961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때부터 인물사 사전, 위인전, 사학서 등을 접하며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도 일찍 세웠다. 사학과 전공은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 문제는 바닷길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학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우리 아버지는 제주에 살려면 제주대로 가고, 떠나려면 서울로 가라고 말했죠. 육지 한번 간다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바다를 건너야 숨통이 틔겠더라고요. 미련없이 서울로 올라왔어요.”

역사를 공부해서 뭔가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애초에도 없었다. 그저 역사를 마주하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서른 살이 되던 해, 하나의 직업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좋아하는 책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첫 취업치고는 늦은 나이였다.

“다들 대학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 들어와서 서른살이면 이미 숙련공이 되어 있는데, 그에 비해 전 좀 늦은 편이었죠. 실무자로서 10년은 해야 어떤 분야든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정말 죽어라고 일했어요. ‘푸른 역사’를 일군 이후에도 실무에서 손 뗴지 않는 대표가 되려고, 출판사 밖을 나가본 적도 거의 없고요. 뭐, 출판사가 영세하니까 제가 몸으로 때우는 거기도 하고요. 하하.”

첫 직장은 종합출판사였다. 출판 시장 논리를 좇을 수밖에 없는 회사라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그 때의 고민은 ‘푸른 역사’ 정체성을 세우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제 눈높이에 맞는 책을 만들고 싶어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시장 논리를 따라가야 하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은 할 수 없더라고요. 잘 맞질 않았죠. 그러다 서른여섯살에 우연히 공동사업 제안이 왔고, 평생 질리지 않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건 ‘역사’뿐이라 전문서적 출판사를 설립하게 됐어요.”

그 뒤로 460여 종의 역사 서적을 냈다. 한가지 우물을 이토록 깊이 팔 수 있었던 건, 상상력과 추진력 덕분이었다. 이뿐 아니라 시민과 역사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푸른역사 아카데미도 이끌었다. ‘역사’란 단어 하나를 대중에 친근하게 심어주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 셈이다.

“일중독자로 유명했어요. 철녀였죠. 그러다 50대 직전 나른함이 오더라고요. 뭔가 다 이뤘다고 생각하니까 매너리즘이 왔던 걸까요? 그 때 제 멘토가 한마디 했어요. 이제부터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라! 그 첫번째가 바로 푸른역사 아카데미였죠. 시민들에 역사 강의를 하고 토론도 하는 단체였는데, 8년간 운영하면서 제 돈을 2000만원 가량이나 보태기도 했어요. 일종의 사회환원방식인 건데, 나눔이 곧 제 안을 채우는 방법이었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필요하구나 싶었어요.”

■아직도 꿈많은, 푸른 청춘

앞으로 저서 500종 발간 계획을 달성하면 주저없이 ‘푸른역사’ 대표직을 떠나겠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었다. 마지막 저서는 무척 특별한 책으로 장식될 것 같아 물었더니, 역시나 멋진 기획이 있었다.

“지금까지 저자들과 책을 만들면서 정리해놓은 고민거리, 그것에 대한 사색과 과정이 투영된 책을 내고 싶어요.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가설을 깨고 다른 가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자신과의 굉장한 투쟁이죠. 그 내면적인 갈등과 고민이 담긴 책을 쓰고 싶어요. 그게 역사서의 묘미기도 하고요.”

많은 걸 이뤘다고는 하지만 그만의 또 하나 꿈이 있다. 역사에 대해 자유롭게 논하고 고민할 수 있는 ‘푸른역사촌’을 만드는 거다.

“가장 힘들 때 길상사를 1년 정도 다녔어요. 어느 날 그 구조가 눈에 들어왔는데, 대웅전이 있고 그 곁에 작은 오두막들이 있더라고요. ‘아, 이거다’ 싶었어요. 푸른역사촌을 만드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역사학자들이 기증하고 싶은 저서와 이미지 자료를 받아 역사도서관을 구축하고, 오두막처럼 타운을 곳곳에 배치해서 집필하거나 연구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죠. ‘푸른역사’ 2대 대표가 나타난다면, 전 이 역사촌 설립에 뛰어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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