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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뮤지컬 ‘영웅본색’이 바라는 이 시대의 영웅

영웅(英雄)은 무너져가는 시대에 돌출한다. 그런데 영웅은 남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1986년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된 ‘홍콩 누아르’는 기존의 무협 영화의 영웅적 면모를 변모시키면서 90년대까지 아시아를 석권했고, 사람들은 성냥개비를 씹으며, 롱코트 입고 쌍권총을 쏘아대는 영웅들에 압도되었다. 그 속을 뚫고 지나온 사람들은 조직을 무너뜨린 배신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형제간(의형제도 포함하여)의 사랑,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 등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며 기꺼이 권총, 따발총 등을 들고 범죄집단과 맞서 싸우는 ‘영웅’의 계보를 줄줄이 꿰고 있다. ‘열혈남아’(1988), ‘첩혈쌍웅’(1989), ‘첩혈가두’(1990) 등으로 이어지는 ‘홍콩 누아르’의 맨 앞에 ‘영웅본색’이 있다.

과거를 추억하려는 최근의 ‘레트로(retro)’ 경향과 함께 ‘영웅본색’이 왕용범 극본, 연출의 뮤지컬로 부활했다. 뮤지컬 음악 작곡자인 이성준은 오래 전 영화를 보며 누아르 영웅들의 감성으로 가득 찼었고, 어른이 되어서 그때의 쿵쿵대던 심장을 떠올리며 작품을 썼노라고 했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흘러나오던 장국영이 부른 주제곡 ‘당년정(當年情)’은 작곡자뿐만 아니라 80~90년대를 지나온 이들의 가슴속에 아련하게 살아 전해 온다. “가벼운 웃음소리 / 나에게 따뜻하게 전해오고 / 너는 나에게 즐거움의 강한 전파를 / 보내주는구나!”로 이어지는 사랑과 우정의 감성이 뮤지컬 ‘영웅본색’을 통해 살아나면서, 뮤지컬은 팍팍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가슴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서사는 영화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직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송자호’, 형의 실체를 알고 잘못된 현재를 바꾸려는 경찰 ‘송자걸’, 자호의 복수를 행하던 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된 ‘마크’, 야망에 눈이 멀어 폭주하는 ‘아성’ 등이 펼치는 욕망과 배신, 그리고 우정과 사랑 등으로 뒤얽힌 이야기는 영화의 영상과 함께 살아 꿈틀거린다.

뮤지컬은 공연 현장에 뛰어난 연기자들(유준상, 임태경, 민우혁, 한지상 등)을 불러들이고,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 1000장이 넘는 ‘엘이디(LED) 패널’과 ‘인터렉티브 프로그램(interactive program)’을 통해 시시각각 빠른 장면 전환과 생생한 무대를 창조해냄으로써 기존의 뮤지컬이 지니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최신 모던아트들이 장면마다 배경을 이루면서 뮤지컬은 ‘아트 뮤지엄’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뮤지컬 ‘영웅본색’은 관객들이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영화처럼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 전개와 장면 전환은 서사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로하게 만들 염려가 있어 보인다. 중장년층의 사람들은 레트로의 바람을 타고 모여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젊은 관람객들은 소문만 듣고 찾아들었으므로 줄거리를 쫓느라 바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뮤지컬이라는 공연 예술이 지닌 특징을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마저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흥부 이야기를 잘 알면서도 판소리 ‘흥부가’ 공연을 매번 흥미롭게 보는 관객들의 심리를 생각해 보라. 뭐가 중요한가? 뮤지컬은 서사이면서도, 서사를 뛰어넘는 노래들로 가득 채운다면 그 서사를 넘어서기 마련이다. 사건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거나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가 낫고, 매 순간마다 서정이 자리 잡는 순간에 배우들의 심정을 곡진하게 표현하는 노래가 살아난다면 뮤지컬은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뮤지컬 ‘영웅본색’은 그러한 공연 예술로서의 음악성이 펄펄 끓어 넘친다. 서사에 녹아드는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노랫가락에 매료되지 않을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대는 언제나 영웅을 갈망한다. 뮤지컬 ‘영웅본색’이 말하고자 하는 영웅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온갖 협잡과 모략이 판을 치는 현대 사회 속을 유영하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영웅, 그 영웅은 사랑하는 형제와 연인, 타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각오하는 자가 아닐까. 창작 뮤지컬을 만들며 욕조 안에서 머리카락을 꺼내는 수고를 했다는 연출 왕용범이 꿈꾸는 영웅이 그러할 것이요, 2020년 경자년을 맞는 우리들도 뮤지컬 ‘영웅본색’이 그리는 영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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