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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전, ‘유사 무관중’의 기억…“그땐 욕 하나하나 다 들렸다”

KBO리그가 21일부터 무관중 연습경기를 시작한다. 2000년대 초반, 롯데 성적 하락과 함께 사직구장도 빈 자리가 많았다. ‘유사 무관중’ 경기에 가까웠다. | 경향DB

2000년대 초반 KBO리그는 암흑기였다. 1997년 IMF 구제금융에 따른 경제 위기로 가라앉은 야구 인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야구장은 더욱 한산해졌다. 구도(球都) 부산의 사직구장도 썰렁했다. 2002년 롯데의 평균관중은 겨우 1910명. 현대 유니콘스의 홈구장 수원의 평균관중은 1797명이었다.

그때 롯데에서 뛰었던 조성환 두산 코치는 “팬들이 없었고, 야구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2002년의 어느 날. 2루수 조성환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였다. 사직구장 백네트 뒤쪽 지정석에 한 팬이 앉아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 지금 야구장이다. 야구 본다 아이가. 바라 바라. 조성화이 지금 타석에 들어서따. 내 보이까, 점마 딱 삼진 무을 꺼 같다. 어라, 저 새X 진짜 삼진 무 뿌리네. 거봐라. 내가 삼진 묵는다 했제. 저 새X 저거 참말로.”

조 코치는 “타석에 있는데 그 소리가 하나하나 다 들렸다. 삼진 당하고 더그아웃 들어가는데, 그 길이 진짜 멀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2020년 봄, 코로나19는 야구를 늦췄다. 어렵게 개막이 눈앞에 왔지만 연습경기를 포함해 당분간은 무관중 경기로 치를 가능성이 높다. 야구장이 썰렁했던 18년 전, 그때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2002년 10월16일 사직 현대전 관중수는 겨우 96명이었고, 3일 뒤인 19일 사직 한화전은 69명으로 더 줄었다. 역대 최소 관중 2위 기록이다.

사직구장 ‘자전거 사건’은 유명하다. 조 코치는 “수비 때 2루 베이스 근처에 서 있는데 관중석 복도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고등학생 쯤 됐으려나. 진짜 허탈했다. 그 순간 ‘저 자전거는 여기 어떻게 갖고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팬이 없는 야구장은 ‘흥’이 함께 사라진다. 장성호 KBS 해설위원은 “팬들 별로 없는 야구장을 가면, 야구장에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신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시즌, 2000년 구단 평균관중은 겨우 1049명이었다. 장 위원은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면, 박수도 받고 신이 나서 다음 타석의 기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팬들이 적으면 그런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책이라도 하면 욕설이 쏟아지던 시절이다. 팬들이 적으면 욕설이 더 잘 들린다. 장 위원은 “그런 날은 경기 내내 경기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그 팬과 신경전 벌이다 끝난다”고 말했다.

정민철 한화 단장은 전주 쌍방울과의 경기를 떠올렸다. 쌍방울의 마지막 시즌(1999년) 평균관중은 757명이었다. 정 단장은 “투수였으니까, 타자와 승부 때는 큰 문제가 안되는데, 주자 1루 때 주자 신경 쓰다 보면 1루쪽 관중들의 한 마디가 다 들렸다”고 말했다. 휴대전화로 약속 잡는 소리가 또박또박 귀에 와 박힌다. 정 단장은 “야구장에 와서 야구 다 안 보고 약속 잡아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05년 4월28일 수원 현대-롯데전. 1루쪽 홈팀 응원석(오른쪽)보다 3루쪽 원정 응원석에 팬들이 더 많다. | 이석우 기자

수원 구장은 대표적인 팬 부족 구장이었다.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을 떠나 서울로 입성하려다 수원에 주저 앉는 바람에 연고 팬들의 응원을 모으지 못했다. 썰렁한 야구장, 중국집 배달원의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외침이 유난히 크게 들리던 구장이었다.

유니콘스 주장을 오래했던 이숭용 KT 단장은 “정규시즌 때는 세리머니를 크게 했던 기억이 없다. 가을야구 가서 팬들이 많아져야 신이 나서 세리머니 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KBO리그는 지난시즌 ‘세리머니의 시대’를 맞았다. 안녕 세리머니, 셀카 세리머니, K 세리머니 등이 흥했다. 팬들이 없는 곳에서 세리머니는 멋쩍고 어색하다. 이 단장은 “팬들이 있어야 세리머니도 있다”고 말했다. 홈런을 쳐도 그저 묵묵히 베이스만 돌 수밖에 없다. 장 위원은 “중계를 하더라도 카메라를 향해 세리머니하기 쉽지 않다. 팬들의 반응이 있어야 세리머니도 신이 난다”고 말했다.

정 단장은 “야구는 여백의 경기”라고 말했다. 경기 시간은 3시간 안팎 걸리지만, 실제 공이 움직이는 시간은 약 18분 정도다. 정 단장은 “남는 2시간42분의 여백을 채우는 것이 바로 팬 분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팬 없는 야구는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썰렁하고 허탈할 수밖에 없다.

▶▶ 무관중 경기 주의 사항 “이건 조심해야 해”

팬들의 응원은 당연히 힘이 된다. 롯데에서 뛰었던 조성환 두산 코치는 “사직구장에 빠빠라 빠라빰이 울리면, 기운이 확 솟는다”고 말했다. 롯데를 상징하는 응원가 ‘부산 갈매기’의 전주다. 조 코치는 “야구장을 메운 팬들과 우리 선수들이 모두 한 팀이 된 느낌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건너편에서 이를 듣는 선수들의 부담감은 커진다. 이숭용 KT 단장은 “사직 구장에서 부산 갈매기 흘러나오면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화의 시그니처 응원이 된 ‘최강 한화’도 한화 선수들에게는 힘을, 상대팀에게는 부담감을 준다.

KBO리그 무관중 연습경기가 21일부터 시작된다. 정규시즌 개막 초기에도 무관중 경기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팬들이 없는 야구는 확실히 다르다. 장성호 KBS 해설위원은 “기운이라고 할까, 승부 근성이라고 할까, 그런게 잘 타오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장 위원은 “같은 맥락에서 벤치 클리어링도 안 일어날 것 같다. 타오르지 않으니까”라고 덧붙였다.

팬들이 보고 있으면 힘이 나는 것은 인지 상정이다. 누군가 지켜봐야, 더 열심히 한다. 이 단장은 “1군 경기와 퓨처스 경기의 긴장감이 다른 게 바로 팬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라고 말했다. 팬의 존재는 선수들의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집중력에 더 신경써야 한다. 조 코치는 “무관중 연습경기에 대비해 청백전에서도 집중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콜 플레이’도 중요한 요소다. 조 코치는 “팬들이 많을 때는 소리 보다는 동작에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팬들이 없으면 소리를 크게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두산 선수들은 타구가 수비수 사이에 떴을 때 큰 소리로 “오케이” 또는 “아이 갓 잇”을 외치는 중이다.

정민철 한화 단장은 “베테랑들은 집중력 유지에 어려움이 없겠지만, 신인급 선수들은 흔들릴 수 있다.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스포츠가 멈춘 가운데 KBO리그, 한국 프로야구의 개막은 세계적 이목을 끌고 있다. 무관중 경기 속 집중력 부재는 경기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야구 선배들이 입을 모은다. “전 세계가 보고 있다. 팬들 없어도 집중력있게 좋은 경기력 보여줘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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