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왕도 직접한 우리 고유 무예 활쏘기, 지금이라도 보편화에 나서야 한다" 나영일 교수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나영일 교수가 자신의 이름과 소속 활터가 쓰여진 궁띠를 허리에 둘러맨 뒤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국궁은 양궁과 달리 활 오른쪽에 화살을 건다. 엄지와 검지로 화살 끝을 쥐기 때문에 깍지(손가락 보호대)는 엄지에 낀다. 카본으로 제작한 개량궁과 화살 5개 등은 30만원 선이면 구입할 수 있다. 김세훈 기자

“우리 것인데 우리가 살려야 하지 않겠나. 뒤늦게나마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20여년 동안 우리 전통 무예 활쏘기를 연구해온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나영일 교수가 활쏘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해 밝힌 소감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 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했다.

나 교수는 최근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활쏘기는 과거 임금들이 직접 했고 무과시험에도 필수과목으로 행해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예”라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많이 늦은 감이 있다. 씨름, 택견 등과 함께 활쏘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최근 20년 동안 국궁을 깊게 파고 들었다. 나 교수는 정조시대의 무예(2003년), 무과총요연구(2005년), 근대문화유산 체육분야 목록화조사(2011년), 우리활터 석호정(2012년) 등 전통 무예에 대한 책을 다수 썼다. 나 교수는 2018년부터 대한궁도협회 산하 대학궁도연맹회장을 맡고 있고 2015년 국궁 교수회를 만들어 4년 동안 초대 회장직도 수행했다. 활을 직접 쏘는 동호인인 나 교수는 “145m에서 쏘면 5발 중 평균적으로 2,3발은 과녁에 맞힌다”며 “단을 따기에는 실력도 부족하고 집중적으로 훈련할 시간도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활쏘기가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 스포츠인가.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큰 활을 잘 쏘는 동쪽 민족이란 뜻으로 동이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진행된 무과시험에서 활쏘기 시험이 800회나 진행됐다. 왕이 무과 최종시험인 전시에서 활쏘기 문제를 직접 출제했고 시험도 지켜봤다. 요즘 시축, 시구처럼 큰 행사에 앞서 임금이 직접 시범으로 활을 쐈고 정조는 활을 아주 잘 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활쏘기 명맥이 이어졌다. 원래 궁술, 궁도로 불렸는데 양궁이 국내에 들어온 뒤 양궁과 구분하는 의미로 국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적인 사료를 예로 들어달라.

“활쏘기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비롯해 고대 문헌에 등장한다. 활쏘기 관련 무형 자산 이외에도 활·화살, 활터 등 유형 자산이 남아 있다. 활쏘기라는 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된 순수한 우리말이다. 역사적으로 한양에서는 대사례, 지방에서는 향사례 등 전국적으로 활쏘기 행사가 많이 열렸다. 사습(私習)은 활쏘기 연습으로 인조 때(1625년)부터 실시했다. 대사습은 총 연습이란 의미다.”

-지금 우리나라 활쏘기 현황은 어떠한가.

“활을 쏘는 사람들은 3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규도(일본식 활쏘기)를 쏘는 일본 사람들이 14만명이고 일본 중고생들도 많이 배우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다. 이전의 우리 활쏘기는 무게, 거리, 정확성 등을 겨루는 등 종목이 다양했다. 그런데 지금 145m에서 쏘는 것, 단 한 개만 진행되면서 다양성을 잃었다. 지금 활터가 전국에 400개 가까이 있다.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곳도 50여 곳에 이른다. 하동군에 활터가 10개가 있는데 서울에는 8개뿐이다. 과거에는 서울에만 27개가 있었다. 장충동, 동대문, 덕수궁, 경복궁, 현재 최고급 호텔이 있는 산 기슭, 용산 미군기지 등이 과거 활터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서울에 남아 있는 유명한 활터를 소개해달라.

“황학정과 석호정이 대표적이다.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황학정은 고종이 만들었다. 석호정은 중구 장충동에 있다. 황학정이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들이 활을 쏜 곳이었다면 석호정은 민간인들이 주로 사용한 장소다. 활터는 이전부터 지역 유지들이 모여 활쏘기를 즐긴 공간이었고 지금도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지역 유지들이 활터에 모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 황학정에는 300명. 석호정에는 100명 안팎 동호인이 있다. 석호정의 경우, 남산관리사무소가 직영해 활터 운영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다.”

-현재 활쏘기 대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국궁은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이다. 개인전, 단체전 등 메달이 두 개다. 주요 활터를 중심으로 1년에 50개 이상 전국대회도 열린다. 많은 대회를 치르느라 정작 활쏘기 보급에는 다소 소홀했다. 육군사관학교는 몇 년 동안 전국대학생국궁대회를 꾸준히 열고 있다. 젊은이들이 편하게 가서 쉽게 활을 쏠 곳이 부족한 건 안타깝다.”

-활쏘기 대중화를 위한 방법이 있다면.

“활터를 따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태권도장에서 활쏘기를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활쏘기 수업이 진행돼야 한다. 실제로 서울 충무초등학교에는 활터가 마련됐고 수업도 행해진다. 실내 국궁장도 더 늘어나야 한다. 활쏘기는 우리 것인데 우리가 너무 안 챙겼다. 문과만 연구할 뿐 무과는 무시당한 경향도 강했다. 서울은 1000만 도시다. 25개 구청에 한 개씩 활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용산 미군 기지, 뚝섬 살곶이 등은 활터가 있다가 없어진 곳이다. 이곳에 활터를 부활시켜야 한다. 태릉선수촌도 없앨 게 아니라 이곳에 전통무예 종합센터를 만들어 전통을 보전시켜야한다. 활터를 만드는 데는 100평 규모 활을 쏘는 사대와 145m 떨어진 지점에 과녁 몇개만 있으면 된다. 그 사이 공간은 늪, 웅덩이라도 좋다. 안양 국궁장인 안양정처럼 배수지 위에 활터를 세우는 것도 괜찮다. 북한도 활쏘기가 문화재로 돼 있다. 남북 교류도 필요하다.”

한국독립당 총재였던 김구 선생(두번째 줄 가운데 왼쪽)이 단기 4282년(1949년) 4월26일 당시 남산에 있던 석호정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에서는 4월23일부터 사흘간 전국남녀궁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사진 밑에는 ‘총재 김구 선생, 부총재 조소앙 선생 취임식 기념, 석호정 사원일동, 단기 4282년 4월26일’이라고 적혀 있다. 김구 선생 왼편에 앉은 사람이 조소앙 선생이다. 나영일 교수 제공

-국내에서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이 만들어졌다.

“법은 있지만 활쏘기는 활성화가 잘 안 됐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오랜 활쏘기 역사를 가졌고 활쏘기가 체계적으로 발전해온 몇몇 안 되는 나라인데 지금은 오히려 주변국보다 늦었다. 2008년 전후 일본은 중학생에게 무도를 필수화했다. 학교에 도장과 활터를 지었고 엄청난 돈을 들여 교육 시스템도 만들었다. 중국도 20년 전부터 전통 활쏘기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양궁 국가대표 선수 출신 감독이 양궁을 그만둔 뒤 소수민족과 교류하면서 전통적인 활쏘기를 되살리고 있다. 5,6년전부터는 중국에서 열리는 대학생 대회에 우리 학생들도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무예 행사들이 자주 열리고 있다.

“충청북도(세계무예마스터십대회)를 중심으로 무예 관련된 국내외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여기에 대한궁도협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단체간 융화를 이뤄내야 한다. 국민 1%를 활쏘기 동호인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인력, 프로그램, 시설 등 3개 부문에 대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양궁이 현대가 후원하면서 급성장했다. 국궁은 전통적으로 전쟁에서 쓰인 무기라는 개념이 강하다. 화약 등 국방 관련 비즈니스를 하는 한화 같은 곳이 지원해주면 좋을 것 같다.”

-활쏘기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이 필요하다.

“앞으로 그와 관련된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한다. 활쏘기라는 행위 외에도 다양한 종류 궁시 문화재, 전통 궁시 제작 기술, 활 관련 기록유물, 사계·편사 등 다양한 경기 방식 등에 대한 추가 연구와 자료 정리가 중요하다.”

-활을 쏘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지금까지 고령층 덕분에 활쏘기 명맥이 유지됐다. 그분들의 큰 공로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활쏘기를 즐겨야만 보편화가 가능하다. 젊은이들의 진취성, 신선함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활터마다 과녁이 3,4개 정도 있는데 하나 정도는 젊은이들에게 내어주는 게 어떨까. 활쏘기에는 전통적으로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 슬리퍼, 반바지는 지양해야 한다. 활쏘기는 어쨌든 전쟁 무기였다. 이 정도 예의는 젊은이들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궁은 무엇

대한궁도협회는 1928년 창립된 조선궁술연구회가 모태다. 조선궁도회(1932년), 조선궁도협회(1946년), 대한궁도협회(1948년)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4년 대한체육회 가맹단체가 됐다. 조준 장치가 없다. 과녁까지 거리가 145m다. 과녁은 폭 2m, 높이 2m66.7㎝ 크기다. 적중 여부만 가린다. 물소뿔로 만든 각궁(角弓)이 오래됐고 가장 다루기 가장 힘든 활이다. 요즘은 카본으로 만든 개량궁도 많이 보급됐다. 전통적인 화살은 대나무로 만든 죽시다. 보급용 카본 화살도 많이 쓴다. 원래 궁도, 궁술로 불렸는데 1960년대 국내에 들어온 양궁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국궁(國弓)으로 부르고 있다. 경기는 한순(한세트)에 5발씩, 총 삼 순을 쏜다. 1단에서 9단까지 있다. 심사는 아홉 순 45발을 쏜다. 1단은 45발 중 24발을, 9단은 40발을 맞혀야 한다. 9단은 70여명 밖에 안 된다. 국궁은 1947년 전국체육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됐고 메달은 개인전, 단체전 등 2개다. 활쏘는 곳을 사정(射亭) 또는 활터라 한다. 전국에 400개에 육박한다. 서울에는 황학정, 석호정 등 8개가 있다. 협회 등록 동호인은 1만명 선이지만 실제로는 3만명에 이른다.

■나영일 교수는

나영일 교수(64)는 전통무예 가치를 드높이고 사료를 발굴하는데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연구자다.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용인대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고 1999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 쓰쿠바대 외국인 연구교수, 중국 연변대 객좌교수도 지냈다. 전통무예 연구에 한평생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제55회 대한민국체육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명의의 대한민국체육상 연구상을 받았다. 무과총요에 보이는 활쏘기(2017년), 올림픽 개막식의 구성과 예술프로그램의 변천과정·한민족씨름의 문화인류학적 기원(이상 2017년), 아시아 무예의 미래(2016년) 등 100편이 넘는 논문을 국내외학술지에 기고했다. 정조시대의 무예, 무과총요연구, 조선중기무예서 연구, 우리활터 석호정 등이 주요 저서다. 태권도공원(현 태권도원) 조성 작업, 씨름 국가무형문화재 등재에도 기여했다. 석호정 부사두, 한국체육사학회장, 현대사학회 부회장, 한국스포츠인류학회 부회장, 한국무도학회 부회장, 체육시민연대공동대표, 세계무예마스터십위원회 교육위원장, 국립체육박물관설립 추진위원 등을 역임했다.

상단으로 이동 스포츠경향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