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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 독일 화폐 붕괴가 불러온 아돌프 히틀러

이데일이TV 제공.

15일 오후 6시에 방송이 된 이데일리TV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 ‘위대한 생각’(연출권 승현 PD)는 임규태 박사 강연으로 화폐가 인류의 경제와 역사에 미친 다양한 영향을 이야기 한다. 기축통화의 변화와 화폐를 통한 경제 패권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후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독일의 혼란도 살펴본다.

인류 최초 화폐는 기원전 2000년 세워진 리디아 왕국의 금화 ‘리디아의 사자’다. 이후 금과 은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금화와 은화가 별도로 주조된 크로이세이드가 등장했다. 기원전 546년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크로이세이드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권좌를 이어받은 다리우스 1세가 다릭 금화와 시글로스 은화라는 페르시아의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화폐가 전파됐다.

로마 제국은 데나리우스 은화를 사용해 500년 간 번영했으나 네로 황제 시기부터 은 함량을 줄이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중세 암흑기를 지나 화폐 경제 부활은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1486년 독일 요아힘스탈 지역 은광에서 채굴한 은으로 주조한 은화인 요아힘스탈러가 인기를 얻는다. 은화는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실물화폐였기 때문에 누구나 은만 있으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1497년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1576년 네덜란드의 달더르 은화가 등장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 통용되던 은화들을 통칭해 ‘탈러’라 불렀다.

네덜란드와 연합해 가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물리친 영국은 해상 패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결별을 선택했다. 결국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승리한 영국은 해상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세계 무역 기축통화가 은에서 금으로 바뀌게 된다.

1694년 설립한 영란은행은 금보관증 제도를 바탕으로 막대한 양의 통화를 공급했다. 영란은행은 금 보관증을 소유한 사람이 금을 찾으러 은행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 착안해 금 한 덩이에 10장의 보관증을 발행하는 기법을 도입했다. 이른 바 ‘10%의 마법’이다.

그런데 은행으로선 금 보유고가 발행한 보관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뱅크런’ 현상이 발생한다. 유럽 열강은 뱅크런을 막기 위해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두 가지 해법을 찾아냈다. 식민지 개발에 자본이 필요했고 전쟁을 벌이면 전비를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해 다량의 통화를 찍어내도 본국 은행에 상환 요청이 들어올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다.

영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 프렌치-인디안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아편전쟁 등 꾸준히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전비 지출 유혹에 빠진 유럽 각 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결국 이들이 폭주 끝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중세 봉건 왕정은 몰락했다. 유럽은 단순히 정치 체제 변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끔찍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예외였다. 미국은 먼로주의를 주창하며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1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영국과 프랑스 등에 무기와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미국은 금 반출을 전격 중단한다. 금 반출이 막히면서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은 금 부족 사태를 겪고 연쇄적으로 뱅크런이 발생했다. 결국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전 세계로 번지는 대공황을 막기 위해 파운드 기축통화를 포기하고 영 연방 블록 경제를 추진한다. 이에 반발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개인 소유 금을 연방준비위원회로 강제 회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 신흥 강국 미국이 기축통화국이던 영국을 넘어 서구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임 박사는 또 독일 국민이 나치의 광기에 휘둘리게 된 것은 1차 대전 후 독일에서 발생한 초고물가 상황에 주목한다. 1차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은 전비 조달을 위해 엄청난 양의 통화를 발행했을 뿐만아니라, 전쟁 중에 산업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1차 세계 대전 후 탄생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3년(1919년~1921년)간 물가는 1조배나 올랐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1923년 11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렌텐마르크라는 새 화폐를 발행하고 옛 마르크와 1조 대 1 비율로 화폐교환을 실시해 수습한다. 하지만 대공황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자 유럽 시민들은 앞다퉈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국가를 불신하던 독일 상황은 불 보 듯 뻔했다. 1931년 5월 당시 독일의 중앙은행이던 제국은행이 파산했고, 시중 은행들도 연쇄 도산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1932년 치러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에 이어 36.8%로 득표율 2위를 기록한 히틀러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었다.

1933년 나치당과 후겐베르크(국가국민당), 파펜 연립내각은 과반수를 확보하고 히틀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히틀러라는 ‘역사적 괴물’의 탄생 배경에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강대국들 간의 금융 및 화폐 갈등과 국가 이기주의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임규태 박사는 합리적인 국민성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는 독일인이 왜 나치의 광기에 빠져들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박사는 “화폐 시스템 붕괴가 촉발한 독일 국민의 증오심이 나치 독일을 탄생시켰다”고 분석했다.

임규태 박사는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을 역임했다.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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