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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킴 응들⑨·끝] “야구는 여성의 사회적 연대 확장” 황정희 여자야구연맹 회장

황정희 제6대 여자야구연맹 회장은 “야구는 여성들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고 말한다. 황 회장이 지난 27일 스포츠경향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의 연대는 굳고 단단하다. 인터넷에서 떠돌던 ‘남자들은 고교 졸업 기수를 기억하지만 여자들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하고 서열로 구분짓는 연대는 끈끈하고 튼튼하며 동문회와 향우회를 통해 외연을 확대한다. 황정희 한국여자야구연맹 신임 회장(46)은 여자 야구의 목표와 존재 이유를 ‘여자들의 연대’에서 찾는다. 황 회장은 야구팀에 신입 회원이 올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러분 경조사는 우리 언니들이 책임진다.” 야구는 종교와 맘카페로 제한되는 2021년 한국 여성들의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는 장치다.

인터뷰가 이뤄진 지난달 27일 황 회장의 책상 위에 ‘원동기 등록증’이 놓였다. 황 회장은 “2종 소형 면허증을 아냐”고 묻더니 “우리나라 1%만 이 면허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125㏄ 이상 오토바이를 몰 수 있는 자격증이다. 막 베스파 1대를 들여놓은 참이었다.

2종 소형은 1%지만, 한국 여자야구는 0.1%도 되지 않는다. 여자 야구 등록 팀은 전국에 46개, 등록 선수는 1000명에 모자란다.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고교 졸업식날 2종 보통 면허를 땄고 직장생활 하면서 지게차 면허증을 시작으로 대형 면허, 2종 소형을 연달아 땄다. 지게차, 버스, 트레일러에 대형 오토바이도 몰 수 있다. 이제 한국여자야구연맹을 이끈다. 지난달 16일 투표에서 제6대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황정희 야구연맹 회장의 면허증. 2종 소형부터 대형 면허까지 총 망라돼 있다. 황 회장은 “지게차 면허는 따로 있다”고 말했다. |박민규 선임기자

황 회장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SK네트웍스에서 전국 스피드메이트에 공급되는 워셔액, 부동액, 블랙박스, 엔진오일 코팅제 등 수많은 물품의 구매담당이다. 야구연맹회장 후보를 모시려던 여러 시도가 불발된 뒤 혼잣말로 “내가 해야 되나”라고 뱉은 게 시작이었다. 황 회장은 “지금까지는 경선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공약도 없었다. 무엇보다 ‘황정희가 나간다고? 그럼 다음엔 내가 나가볼까?’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선수·감독 출신 후보는 여러 팀들의 지지를 받았다. 황 회장은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지만, 많은 한국 여성들처럼 단체 구기 종목을 할 기회는 적었다. LG 전자를 다닌 아버지의 영향에 친구들과 잠실 구장 몇 번 간게 전부인 “소프트한 야구팬”에 그쳤다. 2009년 “나보다 운동 못 할 것 같은” 친구가 ‘야구하러 가야 해’라고 말한 게 운명이 됐다. “아, 여자들도 야구하는 구나”라는 걸 알았고, 2004년 제4회 여자야구대회에서 대표팀이 일본에 0-53으로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XX’.

황 회장은 “일종의 애국심이었다. 내가 야구 배워서 이기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야구하고, 조금이라도 알리면 저변이 넓어지고 그러면, 언젠가 일본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야구 실력은 외야수와 주전자 사이”지만 야구팀 총무, 운영 능력은 발군이었다. 나인빅스, 글로리아, 글라디스 등을 거쳐서 2014년 새 팀을 만들었다. “SK를 다니고 있으니까, SK 와이번스에도 창단 지원 요청 제안서를 보냈다. 이름도 ‘와이걸스’라고 지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1군 진입 직후였던 NC 다이노스가 지원을 수락하고 한 달 만에 유니폼을 만들어 보내줬다. 팀 이름은 W다이노스, 황 회장은 회장 출마전까지 팀의 감독이었다.

황정희 한국야구연맹회장은 “야구가 여성들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고 말한다. NC 다이노스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 NC 다이노스 제공

야구의 매력은 ‘함께 한다’는 점이다. 황 회장은 “경기 전에 두 줄로 서서 캐치볼을 한다. 글러브에 공이 딱 들어올 때의 짜릿한 손맛은 공을 주고 받는 상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고 말했다. 캐치볼을 통해 연대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우리 팀에 5살 많은 (성)상명이 언니가 있다. 아들이 대학생인데 ‘야구하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린다더라”라고 말했다. 야구와 같은 단체 구기 종목은 한국 사회 여성들에게 부족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 황 회장은 “그래서 신입회원이 들어올 때마다 ‘남자들 학연, 지연 따지지 않나. 이제 걱정마라. 여러분의 경조사에는 무조건 우리 언니들이 다 같이 간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캐치볼로 다져진, 학연 지연보다 더 센 ‘야연(野緣)’이다.

신임 황 회장의 목표는 여자 야구 활성화다. 어딜 가든, 누군가와 캐치볼을 할 수 있도록 가방에 글러브 2개를 챙기는 황 회장은 “중요한 건 플레이의 완성도가 아니라 야구를 통한 성장의 과정”이라며 “타석에 섰을 때 팀 전체의 온전한 응원과 격려를 받는 경험, 다른 종목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남자 경기와 같은 공, 같은 베이스 거리를 쓰는 여자 야구 규칙 개정도 고민 중이다. 농구는 공 크기와 3점 라인의 거리 등이 조금 다르다. 황 회장은 “진입 장벽을 조금 낮추면, 더 많은 여자들이 야구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0-53은, 지난 2016년 기장 세계여자야구월드컵에서 0-6으로 좁혀졌다. 2019년 LG컵에서도 1-7이었다. 언젠가는 세계최강 일본을 넘어서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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