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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인터뷰] “분석의 시대…심판도 그 길을 함께 갑니다” 이민호 KBO 심판이 사는 법

각팀 전력분석하듯 심판들도 투수 분석

젊은 심판들, 영상 분석 열정 “미래 밝아”

무관중 시대, “소리 커진 더그아웃엔 평정심”

한가위 없는 심판들 “가족들에 늘 미안”

이민호 KBO 심판위원이 지난 14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2001년 9월18일 마산 삼성-롯데전. 그라운드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삼성 투수 배영수의 빠른 공이 롯데 외국인타자 훌리한 얀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순간, 1루주자 펠릭스 호세가 스프린터처럼 튀어 나와 마운드로 돌진했다. 그리고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 관자노리를 적중당한 배영수는 그 자리서 휘청이며 넘어졌다. 다음 수순은 벤치 클리어링. 그라운드는 난장판이 됐다.

사태를 수습해야할 구심은 팔 다리가 모두 묶인듯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머릿 속이 하얘졌고 시야는 흐려졌다.

지난 6월23일 대구 한화-삼성전에서 KBO 역대 13번째로 200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한 이민호 심판위원(51)에게 그날의 일은 가슴 아픈 기억의 한 조각이다. 1999년 군산 한화-쌍방울전에서 선배 심판의 결장으로 땜질 심판으로 첫 1군 출전 이력을 남긴 이민호 심판은 신출내기 심판 시절 구심으로 겪은 그날 일을 돌이키며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만 신경이 곤두섰을 때다. 그런데 눈앞에서 상상 못했던 일에 눈앞의 광경을 보고 그만 멍하니 서 있었다. 선배 심판들이 호세와 배영수를 동시 퇴장시키며 사태를 정리해줬는데, 그땐 그 일로 심판을 그만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심판은 이에 덧붙여 “빈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호세 타석에서 몸쪽 공이 계속 왔을 때 배영수에게 ‘주의’ 한번을 줬어야 했다. 그땐 그게 안보였다. 그게 경험”이라고 말했다.

프로야구 선수들만 시즌 내내 쉼 없이 달리는 건 아니다. 프로야구 심판들도 전국 방방곡곡 야구장을 다니며 한가위 연휴를 관통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이번 한가위에도 일터로 향할 이민호 심판위원을 지난 14일 잠실구장에서 만나 ‘프로야구 심판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광주진흥고 3학년 시절 봉황기 대회 타격상을 받고 한양대에 진학한 뒤 1993년 해태에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이 위원도 야구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끝이 너무 빨리 왔다. 입단 4시즌째이던 1996년 말. 호출로 찾아간 단장실. 얼굴을 맞대자마자 “스카우트 한번 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선수로선 방출 통보였다. 이 심판은 그 순간 오히려 속이 개운했다고 했다. “친구들에 비해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언제나 남들 한 시간 운동할 때 난 두 시간은 해야 따라갈 수 있었다. 내가 결정 못하는 걸 대신 누가 결정해줬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고 말했다. 사흘 고민 끝에 구단 제안을 사양한 이 심판은 강광회, 전일수, 최수원 심판 등 선배들의 권유로 심판의 길을 걷게 됐다.

이민호 KBO 심판위원이 지난 14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이 심판은 2015년과 2016년 2년 연속 ‘선수들이 뽑은 심판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판정에 대한 신뢰가 점차 쌓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심판은 양쪽 더그아웃이 뜨거워질수록 심판은 차가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로나19로 상당수 경기가 무관중으로 열리는 시대. 관중석이 고요해지며 승부욕에 불타는 양쪽 더그아웃에서 나오는 소리가 심판들 귀로 직진하고 있다. 이 심판은 “스트라이크 콜을 하면 타자 쪽에서 반응하고, 그 반대의 콜이 나오면 투수 쪽에서 한다. 더그아웃에서 은연중에 하는 소리가 사실 다 들린다”며 “그 소리를 듣자면 가슴이 벌렁벌렁 해질 때가 사실 있다. 그러나 인내해야 하고, 눈 질끈 감고 넘어가기도 해야 한다. 후배들에게도 늘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철칙은 반말 금지다.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놓고 구심에게 바로 묻는 선수들이 꽤 있다. ‘국민타자’ 이승엽은 현역 시절 “이거 몸쪽 깊은 것 같습니다”라고 바로 반응하기도 했다. 이에 이 위원은 바로 답했다고 한다.

“이승엽 선수, 오늘 저의 존은 여기까지입니다. 최선을 다할테니 믿고 하세요.”

심판과 선수는 대부분 야구 선후배 사이다. 그러나 심판은 선수와의 사담은 금지돼 있다. 이민호 심판은 후배 심판들에게 선수들과 대화할 때 혹여라도 반말을 하면 절대 안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 심판은 그게 심판과 선수 둘 모두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이민호 심판의 눈에 요즘 젊은 후배 심판들은 여간 대견한 게 아니다.

모든 경기의 판정이 비디오 판독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그 장면들이 포털 사이트에 모두 올라오는 디지털 시대다. 이 심판은 “요즘 후배들은 경기별 주요 판정 장면 영상을 다 찾아보며 공부한다”며 “오히려 영상을 너무 봐서 ‘내 왜 실수 했지’ 하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어 ‘너무 빠지지 말라’고 조언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전체 심판들의 경기 준비도 분석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경기를 앞두고 각 팀이 상대팀 전력을 해부하듯 심판들도 해당 경기의 주요 판정 대상을 분석한다. 주요 대상은 양 팀 선발 투수. 이 심판은 “경기조 심판들은 그 날 경기 예고된 선발투수 영상을 보며 주요 구종과 견제 동작을 세밀히 분석한다. 결정적일 때는 어느 구종, 어떤 궤적으로 공을 들어오는지 보면 정확한 볼 판정에 도움이 된다”며 “옛날과 달라진 게 바로 그런 점”이라고 말했다.

다음 경기를 대비하는 조별 분석은 거의 정례화돼 있다. 각 팀이 다음 경기를 대비해 상대를 분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빠른 시대 전환 속에 때로는 과거의 향수도 소환된다. 관중석에서 날아오는 김밥을 맞기도 했던 이 심판은 지난 시간의 일들을 낭만이라고 불렀다. 한화 김인식 감독 시절인 2000년대 중반 대전구장에서는 통로 밖에서 40~50명 팬들이 소주를 마시면서 ‘심판 나오라’며 진을 치고 있어 운동장에 말이 묶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동료 심판이 9회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나온 홈 상황에서 오심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구단의 도움으로 한화 차량을 타고 외야 쪽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낭만에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지난 10일 대구 삼성-KT전에서 구심 김성철 심판이 삼성 투수 마이크 몽고메리가 던진 로진백에 맞았을 때는 여간 마음이 무거웠던 게 아니라고 한다. 이 심판은 “4회에 일이 벌어졌다. 김성철 심판한테 전화 해서 ‘뒤에 5이닝을 어떻게 버텼어. 고생했다’고 했다”며 “심판도 사람인지라 남은 이닝을 차분하게 판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판은 컨디션 문제로 경기에서 빠질 수도 없다. 그게 숙명”이라고 말했다.

이민호 KBO 심판위원이 지난 14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또 한번의 한가위다. 이 심판은 가족 생각부터 했다. 아내 이은씨(48)와 두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 뿐이다. “명절은 거의 챙기지 못했다. 가족들이 오히려 그 환경에 적응했다”며 “남편이 있어야할 자리에. 아빠가 있어야할 자리에서 함께 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 심판은 이번 한가위에는 광주로 향한다.

이 심판은 야구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 하나를 덧붙였다. 한국야구는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노메달 수모를 겪었다. KBO리그 수준도 도마에 올랐다. 심판들은 한국야구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사람들이다. 투수들의 구위를 가장 가까이서 잘 볼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이다.

“한국야구는 지금 세대교체 기간 같아요. 좋은 선수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들이 3~4년을 보내며 경험이 쌓이면 리그 전체가 달라질 겁니다. 프로야구는 다시 올라올 겁니다. 팬들도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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