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4화)

“똑똑.”

채 상무가 세라의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세라는 깜짝 놀라 동문지를 한쪽으로 밀었다. 책상 밑에 벗어놓은 하이힐로 갈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런칭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세라는 채 상무의 빨간색 하이힐에 눈이 갔다. 구두 앞 코에 박힌 생로랑의 금장 로고가 반짝였다.

“네, 상무님.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라의 부서는 가을에 출시할 새로운 아이섀도를 기획 중이었다. 아이섀도는 같은 계열의 색상이라도 펄이나 색의 농도에 따라 발색이 달랐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판매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세라는 신경이 예민했다.

두통이 밀려와 책상 서랍에 상비한 약을 먹었다. 발색 테스트를 하느라 세라의 팔뚝에는 20여 개의 색상이 뒤섞여 옅은 흔적이 무지개처럼 남았다. 김선형이 매일 색조 화장품을 팔뚝에 그어대는 탓에 민감한 피부였다면 이 일도 못 할 뻔했다며 투덜거렸다.

세라는 오일 클렌징으로 먼저 닦아내고 클렌징폼으로 씻었다. 클렌징을 해도 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옆에서 손을 씻고 있는 김선형을 흘끔 쳐다봤다. 그의 팔뚝은 이미 뽀얀 살구색으로 돌아왔다.

세라는 클렌징을 한 자리에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른 것을 느꼈다. 예전에 없던 증상이었다. 자리로 돌아가 다른 팀원이 눈치채지 않게 벌게진 살갗에 연고를 넓게 펴 발랐다.

채 상무는 화장품 회사의 이미지에 맞는 외모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에게 지속적인 관리를 요구했다. 그래야 고객에게 자사 제품이 신뢰를 얻는다는 논리였다. 그녀는 스타일에서도 다른 임원들과 차별화된 면모를 보여주었다.

현란한 골드 주얼리 대신 빨간색 립스틱을 고수했고 립스틱은 매일 바뀌는 원색의 하이힐과 맞물려 강렬한 포스를 자아냈다. 복장 상태도 유별나게 챙겼다. 오수아가 레깅스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니트를 입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채 상무는 한 손에 드립 커피를 들고 오수아를 위아래로 쳐다봤다.

“오수아 씨, 코스모폴리탄지는 계속 구독하고 있지?”

“네? 아, 네….”

오수아는 채 상무의 시선이 느껴지자 보풀이 생긴 니트의 소맷자락을 뒤로 숨겼다.

회식할 때면 채 상무는 젊은 남자 사원들을 자기 옆에 포진시켰다. 직원들은 채 상무와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기 위해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며칠 후 테스트는 별 탈 없이 통과했다. 5구의 색상을 최종 선택하기로 했다. 세라는 팀원들과 테스트 통과를 자축하기 위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채 상무는 거래처와 선약이 있어 불참한다는 희소식을 전해 왔다. 그편에 법인카드라도 보내면 좋았겠지만, 카드는커녕 아침 회의에 늦지 말라는 당부만 보내왔다.

세라와 팀원들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장가네 고깃집’은 전화 한 통이면 좌석 예약부터 세팅까지 알아서 해주었다. 김선형은 자기가 막내일 때 회식 장소 섭외며 메뉴까지 고려했던 일화를 늘어놓았다. 자기 덕분에 이제 전화 한 통이면 끝난다며 막내 사원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거들먹거렸다.

세라의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화로에 술을 엎질러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남자는 술에 취한 듯 제 자리에 서서 비틀거렸다. 사람들의 찌푸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일어서서 대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세라는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들이마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김선형은 끊겼던 술잔을 다시 돌렸다. 막내가 수줍게 고기 한 점을 들고 세라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팀장님. 이거….”

“김선형!”

세라가 김선형을 쏘아봤다. 김선형은 막내의 애정이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막내가 들고 있던 고기를 대신 먹어 치웠다.

김선형이 화제를 바꿔 조심스럽게 채 상무 얘기를 꺼냈다. 술안주로 올라오는 단골 메뉴였지만, 채 상무가 하이힐 페티시즘 같다는 말은 이번에 처음 나왔다. 자신이 하이힐을 좋아한다고 부서원들까지 하이힐을 강요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얘기였다.

김선형이 여자를 대변해서 말하는 건 의외였다. 채 상무가 남자라면 이해하겠지만, 같은 여자끼리 너무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동시에 여자 팀원들의 시선이 김선형에게 몰렸다.

“상무님이 남자였다면, 하이힐을 신고 일하라는 건 괜찮다는 거예요?”

오수아가 김선형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여자보다 남자가 그러는 게 자연스럽다는 거지….”

김선형은 말끝을 흐렸다. 세라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팀원들의 논쟁이 끝나갈 때쯤 세라는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취한 건 고단한 육체뿐만은 아니었다. 팀원들의 얼굴이 볼록렌즈로 잡아당긴 듯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정신을 차리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사람들 얼굴이 멀쩡하게 보이다가도 정신이 멍해졌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김선형이 세라에게 벌써 취한 거냐며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세라가 힘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 어… 왜 그래요? 팀장님!”

김선형이 세라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직원들이 세라 주위에 몰려들었다. 세라가 눈을 떴을 때 팀원들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피곤했나 봐.”

세라는 이마를 짚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팀원들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자, 주목!”

김선형은 팀원들에게 입에 지퍼를 닫는 손동작을 했다. 채 상무가 이 일을 알게 되면,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르니 애초부터 직원들의 입을 막자는 무언의 지시였다.

세라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먼저 빠져나왔다. 버스에는 세 명의 손님만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 창밖만 내다봤고 버스도 깊은 적막 속에서 엔진 소리만 내고 있었다.

슈퍼의 가게 문 사이로 삐져나온 불빛과 깜박거리는 가로등이 어두운 밤하늘에 엉켜버린 전선 줄 사이로 희미하게 비쳤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만 바쁘게 집으로 향했다.

세라는 슈퍼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샀다.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에 담긴 맥주가 덜렁거렸다. 한적한 골목길에 피곤한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현관 도어록 열리는 소리에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늦었네. 밥은 먹었니?”

“깼어? 회식해서 배불러.”

세라가 퇴근하면 엄마는 항상 밥부터 먹었냐고 물었다. 밥을 빼고 엄마와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어려서부터 입이 짧은 탓에 잠재적으로 엄마의 레이더를 벗어나면 굶는다고 여기는 듯했다.

세라는 옷을 갈아입다가 낮에 연고를 바른 부위를 들여다봤다. 부기는 가라앉았고 감쪽같이 제 살로 돌아왔다. 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하나로 묶은 다음 눈을 억지로 비비며 욕실로 들어갔다. 졸린 눈을 치켜떴다.

거울을 보다가 다리의 힘이 맥없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쿵!”

엄마가 욕실에서 빗겨 나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문을 열어젖혔다. 세라가 욕실 바닥에 한쪽 무릎이 닿은 채 엎드려 있었다. 실수로 미끄러졌다며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엄마는 놀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닫았다.

세라는 욕조에 걸터앉았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신 게 아니었다. 실수로 넘어진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릎에 금세 멍이 들었다. 멍은 동그란 동전처럼 뾰족한 무릎에 내려앉았다. 발갛게 물든 무릎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거울 앞에 다시 섰다. 문득 등에 난 점이 생각났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하였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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