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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13화)

간호사가 수액 양을 확인하고 나갔다. 세라는 문 닫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떴다. 몸을 뒤척여 어두운 창밖을 바라봤다.

‘강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세라는 시간이 늦었다고 핑계를 댔지만, 궁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호의 마지막 카톡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튼을 젖히자 햇빛이 병실에 드리운 그늘을 밀어냈다. 배식 담당자가 식판을 정임에게 건넸다. 정임이 침대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세라는 병실에 비치된 잡지로 눈이 갔다. ‘천지인의’라는 잡지 타이틀이 왠지 의학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내용을 훑다가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진 페이지를 들췄다. 세라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정 박사의 인터뷰 기사와 ‘건강한 삶’이라는 소제목의 칼럼이 두 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었다. 세라는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한 기사에 시선을 멈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인 일리에스쿠씨’라는 해외 기사였다. 곱게 화장한 할머니와 어린 여자아이가 포옹하는 사진을 커버스토리로 담고 있었다. 66세의 한 여성이 인공수정으로 딸을 낳았고 아이가 일곱 살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말미에는 국내의 ‘난자 냉동보관 시술’에 대한 글이 소개됐다. 기사를 훔쳐보던 정임이 과일을 깎으며 아이가 무슨 죄냐며 혀를 찼다. 세라는 정임의 말에 급하게 책을 덮었다.

환자 한 명이 새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휠체어를 탔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커다란 짐 가방을 침대 위에 ‘철퍼덕’ 올렸다. 묵직한 가방을 보니 하루이틀의 살림이 아니었다.

정임이 보호자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남자가 묻기도 전에 침상을 올리고 내리는 방법과 개인 수납장의 비밀번호 설정하는 법을 알려줬다. 냉장고는 한 칸만 사용하라며 팔짱을 끼고 지켜 섰다. 남자가 그대로 따라 하자 정임은 흡족해했다.

간호사가 침대 머리맡에 환자 이름과 나이가 적힌 이름표를 붙였다. 김예분/여/72세. 의사가 할머니의 무릎을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내일 오전에 수술할 거라며 금식을 당부했다.

“내가 산도 잘 타고 그랬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나 원 참….”

할머니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의정부 산녀’라 불렸고 3년 동안 100대 명산을 돌았다고 했다. 산을 타다 산삼을 캔 일이며 산악구조대에 구조된 이야기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어느새 근심은 사라지고 홍조 띤 얼굴은 자기 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정임은 산삼을 캤다는 말에 반색하며 빠져들었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라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정 박사가 의심할 때도, 병명을 들었을 때도, 곧 폐경이 될 거라는 말도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두었다. 보지 않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승진하고, 순조로웠던 직장생활도 모두 공짜였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는 독감으로 자주 입원했었고 열 번이 넘는 면접 끝에 회사를 들어갔다. 잦은 야근이며 시제품 테스트로 팔뚝은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런 날들이 익숙해져 겨우 작은 평안에 이르렀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하루하루가 음습한 그늘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정 박사가 회진하다 세라의 병실을 들렀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정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정 박사는 가볍게 묵례하고 세라를 살폈다.

“오늘 퇴원하지요? 무리하지 말고 골다공증약도 처방전에 넣어놨으니 함께 복용하도록 해요.”

정 박사는 뒷짐을 지고 잠시 섰다가 서둘러 나갔다. 차트를 든 간호사가 바로 뒤따랐다.

“뭐라고? 너 골다골증 있어?”

정임이 깜짝 놀라다가 주의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뭐, 그게 아니라 예방 차원에서 먹으라는 거야.”

세라는 얼버무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엄마, 저 선생님 잘 알아?”

“저 양반도 사연이 많더라. 미국 병원에 있었는데 여동생이 무슨 병으로 죽었대. 근데 그걸 못 고치고, 자기가 의사인데 그 한이 오죽하겠니.”

정임은 슈퍼 아주머니한테 들은 얘기라며 세안용품을 가방에 넣었다.

“누이가 가고 나서 의사를 그만두고 노숙자 생활했다는 얘기도 있고, 몰라, 뭐가 진짠지. 하여튼 한국 와서 정신 차리고 개원한 거라고 하더라. 근데 슈퍼 여편네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세라는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색 컴포트화를 신었다. 얼마 전 정 박사가 준 쇼핑백을 열었을 때 상자 안에는 바닥이 실리콘으로 된 신발과 메모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간호사들이 종일 신어도 발이 편하다고 하니 신어 봐요. 골다공증 수치도 낮으니, 신으면 관절에 도움이 될 거예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식구가 단출하다고 해도 며칠씩 집을 비운 티는 어김없이 났다. 냉장고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화장수가 구석에 밀려나 있었다. 세라는 모조리 꺼내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세라는 일찍 출근했다. 책상을 손끝으로 매만지니 가슴이 설렜다. 인쇄물에서 올라오는 활자 냄새, 휴게실에서 풍기는 드립 커피 향,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팀원들의 얼굴 모두 그대로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역사가 묻어 있는 회색 카펫까지 모두 반가웠다.

“팀장님, 못 보던 신발인데요?”

오수아는 힐이 아닌 다른 신발을 신은 세라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응. 선물 받았어.”

“누구요? 남자요?”

듣고만 있던 김선형이 뒤돌아 물었다. 세라는 그냥 웃어넘겼다.

책상 위에는 개인 우편물과 홍보용 잡지들이 밀봉된 채 쌓여 있었다. 채 상무가 인터폰으로 세라를 호출했다. 쉬는 동안 산재했던 일과 주간 일정에 대해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렸다. 그리고 나가려는 세라를 불러 세웠다.

“으흠… 앞으로 신발은 자유롭게 신도록 팀원들에게 전달하고, 회사 내에서 어떤 사고도 용납하지 않으니 주의시키도록 해요.”

채 상무는 세라의 흰색 컴포트화에 눈길을 두다가 이내 거뒀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세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 가지, 슬리퍼는 절대 안 돼요.”

채 상무는 억울한 듯 몸을 약간 떨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결기가 느껴졌다.

퇴근 시간이 되자 가느다란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은회색 SUV 차량이 서서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강호는 차 안에서 빌딩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한참 후에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세라가 보였다. 블랙 헤링본 코트에 회색 운동화를 신고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몸을 한껏 웅크려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강호가 짧게 클랙슨을 울렸다. 세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정류장으로 계속 걸어갔다. 강호가 창문을 내리고 세라를 불렀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세라가 강호를 발견하고 차에 탔다.

“거래처 갔다 오는 길인데 그냥 퇴근하라고 해서. 발은 좀 어때. 불편하지 않아?”

“많이 좋아졌어.”

옷에 달라붙은 눈송이를 털며 세라가 안전벨트를 맸다.

“당분간 출근 같이 할까? 퇴근은 일정치 않으니까.”

“아니, 괜찮아. 아침에 많이 막혀.”

“좀 일찍 나오면 되는데.”

“애쓰지 않아도 돼.”

강호는 애쓴다는 말이 진심을 호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발이 굵어져 차량의 흐름이 더뎌졌다. 세라는 생각이 그물처럼 얽혀버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강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항상 내장탕만 먹는다던 부장과 점심은 뭘 먹었는지, 연차는 몇 개나 남았는지, 얼마 전 주문한 캠핑용 화목난로는 받았는지, 무슨 얘기라도 이 침묵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스피커에서 성시경의 노래만 계속 돌아갔다.

강호는 전방을 주시한 채 운전에만 열중했다. 어느새 세라의 집 근처 공원에 다다랐다.

“영지 같으면 퇴근도 시켜 달라고 했을 거야.”

강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나지막했다.

“무슨 뜻이야?”

세라는 강호를 흘겨봤다.

“좀 편하게 가면 안 되냐고.”

“괜찮다고 했잖아.”

“맘 좀 편하게 해주면 안 돼?”

“네 맘이 왜 그렇게 불편한데. 너 때문에 다친 것도 아닌데.”

“그게 쉽게 지나칠 일은 아니잖아.”

“너 정말, 나 비참하게 만들래?”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호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게 제정신이야?”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어도 상관없어. 남자들이 모두 너 같지는 않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강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폭발하는 분화구처럼 세라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세라는 차 문을 열고 빠르게 걸어갔다. 여전히 한쪽 발을 절뚝거리는 세라를 보고 강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따라 나가 다시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그 후로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눈발이 더 거세졌다. 노래마저 사라진 차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스치듯 들렸다.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우산이 서로 부대꼈다. 차도는 갑작스레 거세진 눈발만큼이나 혼잡스러웠다. 시내를 벗어나니 소복이 내린 흰 겨울이 고스란히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한참을 더 가서 차가 멈춘 곳은 시내에 있는 한 모텔 앞이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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