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15화)

제주 공항을 빠져나왔다. 1번 게이트 앞에 있을 거라던 셔틀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셔틀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끄트머리에 ‘천사’라고 쓰여 있는 버스가 언뜻 보였다. 찬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캐리어를 끄는 손이 시렸다. 그 버스에 가까워지자 흰 날개가 인쇄된 현수막에 ‘천사 렌터카’란 글씨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세라는 셔틀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으로 ‘애월’이라고 쓴 도로표지판을 보자 제주도에 온 게 실감 났다.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인수하고 내비게이션에 펜션 주소를 입력했다. 애월읍은 카페 신축공사로 땅이 파헤쳐 있거나 앙상한 골조만 드러낸 곳이 많았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꽉 차 있었다. 창문을 여니 바닷바람이 차 안의 공기를 금세 삼켜 버렸다. 월정리 숙소까지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 김녕에서 월정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눈길을 끌었다. 인공물인데도 자연의 한 부분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밤이 되면 바다에서 육지로 성큼성큼 걸어 나올 것 같았다.

월정리와 가까워질수록 하늘빛이 탁해졌다. 사직서를 냈을 때 채 상무의 얼굴처럼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이 흐려졌다.

“겨우 소문 때문에 이러는 건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뭐가 문제지?”

세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들었다. 채 상무는 독선적이고 속내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소문을 ‘겨우’라고, 그 의미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그녀가 달리 보였다. 세라에게 일순간 적이 아닌 한 편이라는 연대감이 솟구쳤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힐을 고집하는 것도,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방식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지방 출신인 그녀가 해외파 임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건, 길고 가느다란 힐에서 나오는 마법의 힘이었을 것이다. 세라는 영지가 준 하이힐을 신고 편의점 거울을 보았을 때 세상이 조금은 우스워 보였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채 상무도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직원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한 것인지도 모른다.

화창하지 않은 날이라서 다행이었다. 김선형의 농담이 없어서 좋았고, 웃을 일이 없는 아침이어서 좋았다. 배웅하는 팀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마지막이 쓸쓸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면, 세라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팀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짐을 챙겨 나왔다. 김선형이 따라 나오며 짐이 든 상자를 대신 들었다. 오수아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송별회는 언제 할 거냐고 계속 물었다. 눈치는 없지만, 때때로 흥이 많은 오수아도 그리울 것 같았다.

정임은 출장을 간다고 했더니 그대로 믿었다. 일 년에 몇 번은 가던 출장이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라는 무작정 떠나고 싶었고, 그곳이 낯선 곳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곳, 그런 곳이면 됐다.

숙소는 월정리 해변까지 걸어가도 될 만큼 바다에서 가까웠다. 키 작은 주황색 대문 안으로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펜션은 넓은 마당을 끼고 두 개의 독채가 마주보고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캠핑카 모형의 미니버스 한 대가 자리했다. 캠핑카 옆에는 작은 벤치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반대편에는 그네 의자가 바람에 조금씩 삐거덕거렸다. 안채에서 여자가 나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예약한 사람인데요.”

“아, 그러세요.”

여자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핸드폰으로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다.

“유세라 씨, 맞나요?”

“네.”

여자를 따라 밖으로 난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제법 넓은 거실에서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저희는 안채를 쓰고 있어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면 되고요.”

여자가 세라에게 키를 건넸다. 펜션의 홈페이지에 주인 부부가 친절하다는 후기처럼 여자의 말솜씨나 표정은 온화했다.

“저기, 캠핑카 좀 구경해도 되나요?”

세라가 마당에 있는 미니버스를 내려다봤다. 여자는 흔쾌히 구경뿐 아니라 소품 구매도 가능하다고 했다. 먼저 내려간 여자는 패딩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어느새 대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캠핑카 안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미니카부터 모형 비행기, 캔들, 손수건, 핸드메이드 지갑같이 소확행으로 즐길 만한 아이템들이 시선을 끌었다. 뜨개로 된 다용도 케이스도 보였다. 정임이 햇볕이 드는 자리에 앉아 뜨개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계절을 타는 목도리는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비해 사용가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세라가 구시렁대면, 정임은 뭐든 공들인 만큼이라며 두툼한 목도리를 목에다 둘러주었었다.

세라는 손뜨개로 된 지갑을 만지다가 뭔가 생각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시간을 담은 아름다움’

봄 시즌의 타깃 문구로 흠잡을 데 없었다. 핸드폰을 열고 김선형에게 간략한 메모를 쓰다가 손을 멈췄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순간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천천히 둘러보다 벽에 걸린 드림캐처에 눈이 갔다. 흰색 깃털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렸다. 누군가의 기도에 화답이라도 하는 걸까.

“그거, 발리에서 온 거예요.”

세라가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낚시 조끼를 입은 남자가 진열장에 새로운 소품들을 채워 넣고 있었다.

“발리요?”

“여행 중에 원주민한테 산 거예요. 잘 때 머리맡에 걸고 자면 좋은 꿈을 꾼다네요.”

세라는 흰 깃털이 흔들릴 때마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주술에 걸린 듯했다.

“이것도 파는 건가요?”

“그럼요. 이쁘죠?”

남자가 드림캐처를 공중에 들어 올리며 짙은 눈썹을 치켜떴다.

“이게 말입니다. 원래 인디언한테 유래된 건데, 나쁜 꿈을 꾸면 여기, 여기 있죠.”

다시 원형 틀 안에 있는 그물을 가리켰다.

“여기 그물이 나쁜 기운은 걸러내고 좋은 기운이 이 깃털을 타고 내려가서 사람에게 스민다고 해요. 그래서 잠잘 때 머리맡에 걸어 두라고 하더군요.”

남자가 세라에게 들어보라고 드림캐처를 내밀었다. 세라는 그것을 들어 올리고 신기해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깃털이 춤을 추었다.

“정말… 그럴까요?”

저녁이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평일이라 세라 외에 다른 투숙객은 없었다. 펜션 부부는 세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안채 현관에는 사진 액자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 교토의 청수사, 빅토리아 항구에서 찍은 홍콩의 야경, 장소는 달라도 부부가 손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는 포즈는 한결같았다.

세라가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주인 남자는 최근에 오사카를 여행했다며 대형 글리코 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갓 결혼한 커플처럼 애정 어린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주인 여자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를 잔꽃 무늬가 가득한 자기에 담았다. 부부는 끊임없이 여행 이야기를 했지만, 세라는 지루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에 여자는 세라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갔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골드 장식 볼이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였다. 외부의 찬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씌워 놓은 투명한 우레탄 창이 테라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주인 여자가 유튜브에서 재즈 음악을 틀고 향초에 불을 붙였다. 쳇 베이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자 강호를 따라 영지와 캠핑간 일이 생각났다.

강호는 늘 쳇 베이커의 플레이 리스트를 핸드폰에 담아왔고, 다음 날 집에 갈 때까지 그에 대한 역사와 음악을 얘기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를 들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그게 뭔데?”

영지가 장작불에 잘 구워진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물었다.

장작을 옮기고 있는 강호 대신 세라가 대답했다.

“내가 책에서 본 건데,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붉어지면서 여러 색을 내잖아. 이때 멀리서 보면 언덕 위에 있는 개와 늑대의 모습이 구분되지 않는대. 유럽에서는 그 시간을 그렇게 부른대.”

“한마디로 혼돈의 시간인 셈이지.”

강호가 화롯대에 장작을 넣으며 거들었다.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개와 늑대의 시간. 위험하기도 하고, 야생의 늑대를 내가 키우던 개로 잘못 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보면 쳇 베이커는 삶 자체가 그런 시간이었는지도 몰라. 항상 음악과 마약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았으니.”

“그래도 음악은 굉장했잖아. 나는 블루룸이 좋던데, 들어봤니?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 오글거리기는 한데, 가사가 멋져. 두 사람을 위한 파란 방을 만들고 싶다는 게 소박하면서도 너무 로맨틱한 거지.”

영지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툴툴댔다.

주인 남자가 소품숍에서 봤던 뜨개 받침을 하나씩 놓고 그 위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감귤 차인데 드셔보세요.”

여자는 조천읍에 자그마한 귤밭이 있는데 직접 재배한 거라며 감기 예방과 미용에 좋다고 했다. 세라는 테라스의 온기와 향초의 은근한 냄새가 어우러져 금세 노곤해졌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홀리데이 시즌 제품이나 특별행사 준비로 야근을 일삼았었다.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고 급한 불이 꺼지면 무중력 상태에 빠진 것처럼 모든 일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돌아갔다. 야근도 약속도 일정표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친구들의 카톡방에서는 서로 무능함을 감추며 눈치만 보고 있다가 누군가 다를 뭐 하냐고, 슬쩍 운을 떼면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이번에는 이조차 세라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영지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 다시 시작한다며 설레었고 강호는 솔로 캠핑 동호회 사람들과 태백에 간다며 눈이 내리기만 기다렸다.

세라는 멍하니 향초의 심지를 쳐다봤다. 핸드폰 불빛이 깜박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만 올린 단체대화방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는 메아리만 공허하게 돌아다녔다.

갑자기 들어선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인 남자가 테라스의 우레탄 창을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

“여기 노을이 죽이거든요.”

하늘은 한 폭의 유화처럼 여러 색이 겹쳐져 전혀 다른 하늘빛을 내고 있었다. 세라는 가슴이 뛰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혼돈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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