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연재소설] 세라의 티키타카(21화)

“세라, 자요?”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세라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카시가 두 볼이 발그레한 채 배시시 웃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파티가 있어요. 카페로 내려올래요?”

세라는 카디건을 걸치고 영문을 몰라 아카시를 따라 내려갔다.

일 층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손에 맥주병을 들고 제이슨 뮤라즈의 노래를 떼창하고 있었다. 바에선 캡틴이 칵테일과 맥주를 손님들에게 건넸다. 그의 얼굴도 상기된 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잔해요. 이건 무알코올이에요.”

캡틴은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피나콜라다를 내밀었다.

“무슨 날이에요?”

“일 년에 두 번 여행자 파티를 해요. 오늘이 그날이고.”

세라는 칵테일을 마시며 그들을 바라봤다. 한 무리가 돼서 엉켜 있는 사람들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들 사이에 도경이 보였다.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쓴 동남아시아계 여자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카시가 신이 나서 그 여자와 도경 사이에 끼어 앉았다.

여행객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오랜 친구를 대하듯 다정하게 대했다. 세라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여겨보며 아는 사람이 있는지 훑었다. 삼사 일 후면 떠나는 투숙객들이기에 얼굴은 낯설기만 했다. 원룸으로 옮긴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도경이 있었지만, 그는 카메라에 사람들의 표정을 담는 일 외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잔을 들어 올리고 각자 자국어로 건배사를 시작했다.

“재밌어요?”

캡틴이 맥주를 병째 들이켜며 말했다.

“이런 파티 처음이에요!”

세라는 음악 소리 때문에 조금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행자들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었다. 소박하게 웃고 절제된 행동으로 파티를 즐겼다. 세라는 맥주잔으로 바꾸고 건배사에 한 잔씩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가 움츠렸던 온몸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중국인 투숙객이 선창했다. “깐베이!” 뒤이어 여기저기서 “샬롯” “스콜” 하며 자기들만의 언어로 건배를 했다. 세라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캡틴이 “아리랑!” 하자 모두 일어서서 환호를 질렀다. 흰 거품이 차오른 맥주잔들이 허공에 모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들 자기 목소리에 취해 내일의 창피함 따윈 던져버렸다.

스피커에서 시아의 중저음 목소리가 나오자 흥분했던 사람들이 차분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리듬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건배사를 했던 중국인은 홀로 취해 그 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Don’t cry snowman don’t you fear the sun. Who’ll carry me without legs to run honey. without legs to run honey…. 허스키한 음성이 카페 안을 휘감았다. 도경이 카메라를 들고 바 쪽으로 옮겨 왔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며 모니터를 확인했다. 도경의 얼굴이 단풍이 물든 가을 산처럼 울긋불긋했다.

“많이 마셨어요?”

세라가 물었다.

“네? 잘 안 들려요.”

시아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갔다. 도경이 귀를 세라 쪽으로 기울였다.

“아까 옆에 있던 여자요. 이상한 모자 쓴, 잘 아는 사이예요?”

“안젤라요?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에요. 필리핀에서 왔대요.”

세라는 도경의 말에 입을 내밀고 실룩거렸다.

“참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웃는다고? 난 완전 스노맨인지 알았지.”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예요?”

“아, 됐어요. 됐어.”

세라가 손을 내저으며 맥주를 더 마셨다.

도경은 사진을 찍다 말고 맥주잔을 잡았다.

“취한 거 같은데, 그만 마시죠.”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춤추던 중국인이 세라 옆으로 다가왔다. 세라의 팔을 잡고 홀 중앙으로 밀려고 했다.

“노, 노, 노”

세라는 웃으며 거절했지만, 중국인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영어 발음이 꼬여 있었다.

“그만해, 싫다잖아.”

도경이 이마를 찌푸리며 한국말로 말했다. 중국인은 알았다며 두 손을 비비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신 좀 차리고 있어요.”

“뭐라고요?”

세라가 못마땅한 듯 도경을 노려보자 캡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싸우지 말고, 우리 나중에 거기 한 번 갑시다. 우메다 공중 공원. 거기 전망대에 갔다 왔어요들? 야경이 정말 죽이는데.”

그때 “스콜”을 외치던 덴마크 여자가 캡틴에게 리듬을 타며 걸어왔다. 애교 섞인 장난기에 사람들이 웃어댔다. 여자는 캡틴의 손을 이끌고 홀 중앙으로 나왔다. 캡틴은 못이기는 척 끌려 나가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며 물개박수를 쳤다. 여자의 스텝을 따라가다 다시 자기가 이끌었다. 세라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엄지척’하며 소리쳤다.

“캡틴 짱!”

사람들의 환호 속에 세라는 자리에 앉았다. 느슨해진 눈꺼풀에 힘을 주며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이제 여행자들처럼 들뜨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눈빛이 반짝이다가도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고립된 시간을 걸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운 몸짓만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세계에 발을 디뎠다. 모두 떠날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변화를 눈치챌 만한 사람이 캡틴과 아카시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파티가 거의 끝나가자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투숙객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거나 몇몇 사람들은 남아 계속 얘기를 했다. 세라는 카페에 남아 아카시와 함께 뒷정리했다.

“괜찮아요?”

캡틴이 세라에게 물었다.

“말짱해요. 춤 잘 추시던데요. 아까 멋졌어요.”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세라는 의자를 정리하다가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며칠 전 카페에 들이닥쳤던 요시메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장바구니를 들고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그날 캡틴은 그녀가 화장품 가게 주인이라고 알려줬다. 그녀에게 어디를 갔다 왔는지, 왜 세라를 니코리라고 불렀는지 물었더니 전혀 기억을 못하더라고 말했다. 불쑥 화장품 가게에서 본 일본어로 된 제품 설명서가 생각났다. 세라는 그것을 사진 폴더에서 찾아 캡틴에게 보여줬다.

“혹시 이거 좀 봐주실래요?”

“제가 보기엔 화장품 원료고, 무슨 추출물인 것 같은데, 이 단어는 생소해서요.”

캡틴은 안경을 끼고 사진을 확대했다.

“가라구, 토미센, 스? 천연 가라구토미센스?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가라구토미세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요.”

세라는 골몰히 생각하며 혼자 입속말로 재깔였다.

“요시메상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그게 제일 확실할 것 같은데.”

캡틴은 짙은 눈썹에 힘을 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갑자기 세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 생각났어요. 갈락토미세스, 갈락토미세스였어요!”

세라는 검색창에 서울 날씨를 확인하고 미세먼지 유무를 살폈다. 정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마스크 착용을 당부했다. 정임은 걱정하지 말라며 두통은 좀 어떠냐고 물었다. 약통을 열어보니 마지막 한 알만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방받은 약들이 거의 떨어져 갔다. 세놀리틱항체약도 몇 알 남지 않았다. 정 박사가 노화를 지연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직접 조제하고 처방해 준 약이었다.

용건이 거의 끝나갈 즈음 정임은 매번 그러듯이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언제쯤이란 말에 베개 밑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주우며 아직은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세라는 남은 알약을 보고 달력의 날짜를 세었다.

퇴근할 때 라멘집 사장은 주방의 배수관 공사를 한다며 직원들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세라는 오래간만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어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캡틴이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원 다녀와요?”

“참, 다케시상이 라멘 집 공사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내일 하루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세라는 집이라는 말을 듣고 코끝이 매워졌다.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정임의 붉은 얼굴이 떠올랐고 어두워진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는 힘없는 어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난 내일 서울 갈 일이 있어서 표를 알아볼 건데, 여행사 친구가 있거든요.”

캡틴은 여행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표를 확인했다. 출발시간을 확인하며 세라를 한번 쳐다봤지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만 계속 접었다. 텅 빈 눈빛이 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그럼 한 장만, 그 시간으로 해주라.”

캡틴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갈래요. 가고 싶어요.”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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