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연재 소설] 세라의 티키타카(26화)

모자 가게의 내부 인테리어는 빈티지하고 아기자기한 소품 다락방 같았다. 계절과 상관없이 한겨울 뜨개 모자와 망사로 된 모자가 눈길을 끌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가 와인색 페도라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세라는 버킷 모자를 고르다가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 여자가 걸을 때마다 크롭티 아래로 배꼽이 보였다 사라졌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모델 같은 자세로 한껏 멋을 부렸다.

여자가 계산하는 동안 세라는 30% 세일이라고 붙어 있는 검은색 페도라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어린 왕자의 코끼리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볼록한 크라운 때문인지 생기가 돌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여자처럼 완벽해 보이지 않았고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딘가 어색했다. 결국 버킷 모자만 들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돌아오면서 계속 페도라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도경은 카페에 앉아 늘 그랬듯이 마른 헝겊으로 카메라를 닦았다. 가까스로 붙여놓은 배터리 커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수리를 맡기지 그래요.”

아카시가 보다못해 말했다.

“서비스 센터에 물어봤는데 지금 맡기면 수리하는 데 2주나 걸린대요. 공모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전까지 버텨 볼 라고요.”

“공모전이 있군요! 사진은 많이 찍었어요?”

“그렇긴 한데 마음에 딱 와닿는 사진이 없어서….”

카페 문이 열리고 하루마가 들어왔다.

“어서와, 하루마.”

아카시가 말했다. 하루마는 도경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묵례를 했다.

“캡틴은?”

“일이 있어서 서울에 가셨어. 그런데 그 여자랑은 얘기가 잘 됐어?”

하루마는 의자에 앉아 얼음물 한잔을 달라며 손짓했다.

“어머니가 펄쩍 뛰셔. 그 여자는 안된다고. 내 생각에는 그쪽이 조건이 훨씬 좋은데.”

“요시메 상 정신이 드셨어?”

“어제 몸이 안 좋다고 일찍 들어가시더니 이제 나를 알아보셔.”

“그래? 그럼 지금 결정해야 할 타임 아니야? 또 언제 옛날로 돌아가실지 모르잖아.”

“오늘 가게에 나오신다는 데 그 여자가 또 찾아올까 봐 그게 걱정이야.”

도경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하나하나 살폈다. 컴퓨터에 옮겨놓은 사진들과 B컷 사진들을 찾아 삭제해 나갔다. 공교롭게도 사진들 속에 세라의 모습이 많이 찍혀 있었다. 사각 프레임 끝에 걸려 있거나 비스듬한 각도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사진 속 세라의 모습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수척해졌으며 웃는 모습은 어느 한구석이 비어 있어 완성되지 않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음 사진은 얼마 전 고베에 있는 하버랜드의 야경을 보며 노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선 유람선의 불빛이 바다 위에서 춤을 출 때 여행자파티에서 맥주를 들고 몸을 흔들던 세라의 모습이 겹쳐졌다. 도경은 순간 렌즈에서 눈을 뗐었다. 곧이어 세라가 카페 창밖을 멍하게 쳐다보는 사진이 나왔다.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악몽을 꾸었다고 뒤돌아서 울먹이던 날이 생각났다. 민낯에 좀비처럼 시장 골목을 돌아다닌다고 세라에게 말을 해놓고 도경은 그날 밤 잠을 뒤척였었다.

“도경,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도경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셋이 한 번 뭉치자고요. 나이도 비슷하니.”

하루마가 도경을 보며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네. 뭐. 그러죠.”

“그리고 한 사람 더 있네요.”

“누구?”

하루마가 묻자 아카시는 카페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세라를 가리켰다. 세라는 버킷 모자를 쓰고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갔다. 도경은 세라의 모습을 지켜봤다.

화장품 가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세라는 반가웠다. 분명 요시메가 나와 있다고 생각했다.

“요시메 상.”

요시메가 모습을 보이며 내실에서 나왔다.

“어서 와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세라가 말했다.

“요 며칠 좀 쉬었더니 가뿐해졌지 뭐야.”

“정말 다행이에요.”

세라는 요시메의 얼굴과 말하는 모습을 찬찬히 챙겼다. 안색은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들뜨지 않고 한곳을 쳐다보며 집착하지도 않았다.

“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세라 씨, 내가 또 실수했나 보군요.”

“요시메 상! 돌아오셨군요! 고마워요!”

세라는 그녀의 주름진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진정해요. 아가씨.”

요시메는 내실로 들어가더니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나왔다.

“하루마한테 얘기 들었어요. 세라 씨가 한국에서 화장품 회사의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전해준 사업설명서도 잘 봤고, 준비를 많이 했더군요.”

“읽어봐 주셨다니 감사드려요. 저 진심으로 해보고 싶어요.”

“나는 원리원칙주의자예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일하면서 많이 힘들어했죠. 그게 나만의 사업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요.”

“전 요시메 상의 그런 점을 배우고 싶어요.”

“내 발효 추출물을 원하는 업체들이 많았지만, 다들 사업적 이익이 우선이라 추출물에 장난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업이라는 게 원래 돈을 벌려고 시작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규모와 상관없이 제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자를 찾고 있어요.”

세라는 마른침을 삼켜가며 그녀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세라 씨도 알겠지만, 내가 아프고 보니 이제는 내 욕심만 가지고선 일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함께 해봐요. 내가 투자자가 되겠어요.”

“네? 투자요?”

세라는 고개를 들어 요시메를 쳐다봤다.

“세라 씨가 돈이 얼마나 있겠어요. 이 좋은 원료를 가지고 구멍가게나 할 생각이었어요?”

요시메의 두 눈이 세라를 주시했다. 텅 빈 눈망울이 아닌 결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세라가 가슴을 움켜쥐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요시메는 물 한잔을 가져와 세라에게 마시게 했다.

“천천히 숨을 쉬어봐요. 후후후. 다시 들이마시고.”

그녀는 아기를 다루듯 세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순간 어지러워서요.”

“그동안 고민이 얼마나 많았는지 내가 그 마음 알아요.”

세라는 정신을 차리고 요시메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해볼게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볼게요.”

세라는 회사를 그만두며 참았던 울분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사업을 시작하면 서울로 돌아가 정임에게 당당하게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아픈 것도 희소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일의 욕망 뒤로 숨어버렸다.

요시메는 하루마를 불러 보는 앞에서 세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하루마는 아쉬웠지만 요시메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세라는 요시메와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자 벅차오르는 희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캡틴과 도경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축하받고 싶었다. 정임에게도 이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자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요시메를 다정하게 불렀다.

“요시메 상.”

세라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서둘러 서류를 가방 속에 넣고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또 오셨군요. 한발 늦으셨습니다.”

하루마가 손님에게 말했다.

손님에게서 진한 딥디크 향수 냄새가 났다. 익숙한 향수 냄새에 세라는 기분이 서늘했다. 세라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손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온몸이 그 여자에게 반응하듯 굳어졌다.

여자의 눈동자도 멈춰 버렸다.

“유… 유 팀장.”

세라의 눈앞에 채 상무가 서 있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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