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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숏평] 짧고 강한, 서평연대 스물여섯 번째

■AI 지도책(케이트 크로퍼드 지음 / 노승영 옮김 / 소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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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데이터의 바다에서 탄생한 것 같은 생성형 AI도 그 근본은 지구의 수많은 자원이다. 희토류를 비롯한 지구의 광물자원과 에너지, 값싼 노동력, 무작위적인 대규모 데이터 추출을 통해 탄생한 인공지능은 그야말로 지구 자원에 관한 추출 산업이자 인류의 미래를 당겨 쓰는 무모함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AI를 단순히 눈앞에 있는 ‘영리한 기계’로 볼 것이 아니라 ‘지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래야 할까? AI는 지도를 그려야 할 만큼 지구 곳곳의 수많은 유·무형의 자원 추출을 통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데이터와 자원 추출을 통해 AI산업은 어디에 도달하려는 걸까? 바로 지구를 연산 가능한 형태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말미에서 인용한 니체의 말처럼 AI산업이 추구하는 ‘연산 가능한 형태의 지구’란 ‘다면적이고 계산할 수 없는 것을 동일하고 비슷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위조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연산을 위해 유·무형의 자원을 대규모로 추출하는 지금 방식의 AI산업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당수의 비판적 사회과학책이 그렇듯이 이 책의 대안도 연대지만, 구체적이진 않다. 이 책은 대안을 말하는 책이기보다는 AI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능만으로도 이 책은 AI를 지나치게 찬양하거나 추상적으로 비판하는 책들과 비교해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독보적인 책이다. 인공지능의 문제는 결국 기술로 둔갑한 자본 독재의 문제다. 이 복잡한 문제에 관해 고민하고자 하는 정의로운 독자에게 이 책은 좋은 시작점이 될 것이다. (맹준혁 / 출판편집자)

맹준혁

■헌치백(이치카와 사오 지음 / 양윤옥 옮김 / 허블)

헌치백_표지

헌치백. 낮잡아 일러 ‘꼽추’라는 뜻이다. 2023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당사자 문학으로 일본 사회에 화두를 던진 이 소설은 “평범한 여자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이라 말하는 40대 여성 ‘샤카’가 주인공이다. 샤카는 선천성 근육병증을 앓는 중증 장애인으로, 중학생 때부터 목에 기관 삽관을 했고 등뼈가 S자로 휘었으며 근육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작가 이치카와 사오의 난치병과 같은 ‘근세관성 근병증’이다.

샤카는 소설 내내 장애인이 겪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돌을 던진다. 임신 중절을 욕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이책 애호가들을 조소하고 일본 출판계의 우월주의까지 통렬히 꾸짖는다. 종이책 독서는 근육병증이 있는 중증 장애인에겐 등뼈에 부하가 걸려 상당한 건강권을 요구하는 행위라 진작 대안이 마련됐어야 했지만 비장애인들은 ‘종이 냄새’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을 운운하며 종이책을 낭만화하기에만 바빴으며, 일본 출판계는 도서관에서 장애인 이용자를 위한 오디오북 작업이 진행될 때 저작권을 운운하다 장애인의 독서권 확립을 십수 년 늦췄다는 것이다. 소설 내내 드러나는 샤카의 위악은 이렇듯 ‘돌 던지기’의 일환으로서 계속해서 현실 속 부조리를 경유해 비장애인 독자들을 때려 맞힌다.

한국은 다를까? 2021년 국립장애인도서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국립장애인도서관의 장애 유형별 대체자료 제작률은 지난 4년간(2017~2020) 도서 출판량 대비 7.6%였다. 비장애인이 도서관에서 100권을 빌릴 때 장애인은 겨우 7권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나마 장애인 등 독서소외인의 독서권 보장을 위한 ‘독서문화진흥법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법안이 얼마나 빠르게 우리 사회에 안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헌치백’을 읽은 독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따가운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모두가 이 느낌을 오래 기억해야 할 테다. (김상화 /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김상화

■처음 식물(아피스토(신주현) 지음 / 미디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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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유리 용기 안에 생태계를 재현하는 테라리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식물을 사랑한 나머지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테라리움으로 꾸몄다. 어항에선 수족관에서나 볼 법한 물고기가 때때로 펄떡이고, 벽면 곳곳에는 정글 플랜트들이 자란다. 스킨답서스는 벽을 타고 올라 지붕을 만들었다.

그가 들려주는 조금 낯선 식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이야기는 삶으로 줄기를 뻗어나간다. 그의 삶은 사무실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힘차게 자라나는 식물처럼 생동한다. 식물 유튜버이자 편집자·시인·일러스트레이터인, 그리고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들인 그의 바지런한 삶에는 식물들이 알려준 깨달음이 드리워져 있다. 지금 여기 내 삶에 집중할 것.

깨달음은 이내 책장을 타고 넘어와 책을 읽던 우리 마음 한편에 자리잡는다. 그렇게 ‘처음 식물’은 우리의 집중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회에 휩쓸리지 않게 구해 줄 단단한 초록빛 동아줄을 건네준다. (황예린/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황예린

■종말 문학 걸작선 1(스티븐 킹 외 지음 /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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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의 첫 번째 단편은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입니다. 이 단편은 스티븐 킹의 장편들에 가려져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미국 케이블 채널인 TNT에서 이 단편을 바탕으로 동명의 TV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약 45분의 러닝타임으로, 유튜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프리랜서 작가인 하워드 포노이의 마지막 원고입니다. 하워드는 자신의 천재 동생 바비가 어떻게 인류를 종말로 이끌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폭력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바비는 선의로 폭력의 종말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바비가 이끌어낸 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종말이었죠.

TV 드라마는 9·11테러를 끌어오고 미디어의 성격에 맞게 비디오카메라로 하워드가 고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소설은 텍스트라는 성격에 맞게 전동타AFP자기로 고백의 원고를 써 내려가는 구성입니다. 여기서 소설적 묘미가 나오는데, 죽어 가며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하워드가 끊임없이 뱉어내는 오타들이 그것입니다. 말미에 가면 말도 안 되는 오타들이 속출하는데, 의외로 그걸 읽는 쾌감이 있어요. 스티븐 킹 스스로 가장 좋아한다고 한 ‘리시 이야기’도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김미향 / 출판평론가, 에세이스트, 콘텐츠 미디어 랩 에디튜드 대표)

김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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