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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벨리댄스 1호 안유진 교수 “살은 쏙 웰빙에 그만이죠”

세계를 휩쓴 실력으로 서울 세계대회 개최

오해는 이렇게 시작됐다. 매캐한 물담배연기와 끈적한 아랍 음악이, 취한 듯 흐릿한 조명과 함께 무대에 스민다. 흘러내리다가 용케도 멈춰선 그녀의 커스텀(벨리댄스 의상)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퇴락시킨다. 이내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은 ‘시미’(골반을 좌우로 흔드는 것)와 ‘아미’(○형으로 돌리는 것), ‘캐멀롤’(온몸을 흔드는 것)로 이어가며 슐탄을 유혹하는 무희가 된다.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흔들면, 객석은 탄성으로 얼룩진다. 민망하고 불량한 댄스홀의 풍경은 언제나 그랬다.

오해는 증폭됐다. 할리우드 영화 속 팍스 아메리카는 이슬람이 주적이었다. 그러니 벨리댄스는 말초적일 밖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벨리댄스의 ‘시미’에서 유혹을, ‘아미’에서 농염을, ‘캐멀롤’에서 광기만을 찾아냈다. 댄스는 호기심에 주눅들었고, 댄서는 비아냥거림에 눈물을 삼켰다.

오해는 금세 고착됐다. 우리는 그들의 상상대로 상상했고, 그들의 평가대로 평가했다. 결국 한국 내 벨리댄스의 역사는 몰이해와 선입관과의 싸움이었다. 성능 좋은 휴대전화의 진동모드를 닮은 그녀들의 춤사위는, 소리 없는 울부짖음으로 그렇게 힘겨운 터널을 뚫고 왔다. 한국에 벨리댄스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난 13년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반전을 맞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 내 벨리댄스의 역사는 온전히 안유진의 몫이다. 그녀는 호주 이민 중 벨리와 만났다. 즐기다 보니 알리고 싶었고, 벨리댄스를 들고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국적인 벨리댄스는 사람들에게 이질감만 자극했다. 벨리댄스의 한국 내 착상은 처음엔 실패였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스스로 벨리댄스를 즐긴 이유를 들춰내다보니, ‘힐링’(자연치유)에 주목하게 됐다. 벨리댄스는 다이어트와 웰빙이라는 부가가치로 서서로 인식의 폭을 넓혔다.

안유진 스스로가 다이어트와 웰빙의 롤모델이 됐다. 이제 나이 마흔, 168㎝의 몸에 38-24-38의 체형은 그녀가 즐겨온 벨리댄스의 값어치를 높였다. 게다가 대학 2학년의 딸과 고교 2학년의 아들을 둔 학부모란 사실은 트렌드인 ‘동안(童顔) 벨리댄스’의 가능성마저 키워놓았다.

벨리댄스는 이제 일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샤키라가 자신의 노래 안무를 벨리댄스의 율동에 실었다. 안유진 역시 벨리댄스를 가요 운율에 맞춰 공연했다.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제 한국 내에서 3000여명의 강사가 1만여 곳의 강습소에서 벨리댄스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여대와 서울종합예술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만들었다. 벨리댄스가 ‘밸류댄스’가 된 것이다.

안유진은 이제 최고다. 아랍에서 나고 미국과 남미에서 부흥기를 거친 벨리댄스가 한국을 주목하게 된 것은 안유진의 치맛바람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10~13일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세계벨리댄스대회’를 열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 행사죠. 8개국에서 온 1500여명의 댄서가 경쟁을 펼칩니다. 신체적 불리함을 실력으로 극복해 수년간 세계 각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입상했어요. 특히 지난 2월 미국에서 열린 한 대회에서는 8개 부문 10개의 상을 독식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회는 그런 실력이 알려져 무난히 개최할 수 있었죠. 와서 보면 알겁니다.”

한국 아줌마의 힘이 벨리댄스를 정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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