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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돋보기] 이란, 축구에서는 졌지만 더 큰 싸움에서 이긴다

이란-잉글랜드 간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이 열린 카타르 칼리프 경기장에 모인 이란 팬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AP·AFP·로이터 연합

이란 선수들은 국가 제창을 거부했다. 이란 관중은 자유와 여성을 외쳤다. 유럽 몇몇 축구대표팀도 인권을 무시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FIFA는 월드컵 직전 “정치적 표현을 하지 말라달라”고 강조했지만, 인권은 정치가 아니라 기본이며 상식임을 선수, 팬들이 입증하고 있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은 21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잉글랜드전에 앞선 국가 연주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들은 서로 어깨동무는 했지만 입은 굳게 다물었다. 이란 국가에는 이슬람 혁명과 이슬람 공화국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란에서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입헌군주제 왕조가 무너졌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BBC, ESPN 등은 “이란대표팀이 반정부 시위를 거세게 탄압하는 이란 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해석했다. 이란대표팀 주장 에산 하지사피는 경기에 앞서 “이란 현재 상황이 옳지 않고 이란 국민도 기쁘지 않다”며 “우리는 지금 카타르에 있지만 국민 목소리를 듣고 있고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1일 카타르 칼리프경기장에서 열린 조별리그 1차전 잉글랜드전에 앞서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침묵하고 있다. 스카이스포츠 뉴스 화면

인권은 이란 관중도 외쳤다. 칼리프 경기장을 찾은 이란 팬들은 ‘이란에 자유를’ ‘여성 생명 자유’ 등이 적힌 손팻말을 내걸었다. 전반 22분에는 “아미니”라는 외침도 들렸다. 마흐사 아미니는 지난 9월13일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의문사를 당한 22세 여성이다. 전반 22분은 그의 나이를 의미했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두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이란에 있는 인권단체에 따르면, 최근 몇달 동안 이란에서는 반정부 시위 도중 최소 419명이 사망했다. 이날 칼리프 경기장을 찾은 이란 여성 마리암(27)은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난생 처음으로 축구경기를 직관했다”며 “이란 여성이 히잡 착용에 대한 선택권을 갖게 됐다. 이제는 축구장에 갈 권리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마리암은 히잡을 쓰지 않고 T셔츠를 입은 채 갈색 머리를 어깨 아래로 내렸다고 AP는 설명했다. 17세 이란 여고생 아누샤는 AP에 “몇 달 전에는 이란이 잉글랜드, 미국을 이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이란은 잉글랜드에 2-6으로 크게 패했다. 이란은 오는 25일 웨일스, 29일 미국과 잇달아 맞붙는다. 미국은 이란과 오랜 글로벌 앙숙이다.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주장 해리 케인은 당초 원러브 암밴드(왼쪽 사진)를 카타르월드컵에서 착용하려고 했지만 국제축구연맹 반대로 대신 ‘차별금지’라고 적힌 밴드를 차고 이란전을 뛰었다. AP연합뉴스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 축구대표팀도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을 치렀다. 당초 이들은 성소수자 권리 등을 강조하기 위해 무지개 바탕에 ‘하나의 사랑(One Love)’라고 적힌 암밴드를 착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FIFA가 월드컵 개막 직전 이 밴드를 착용할 경우 옐로 카드를 주겠다고 엄포를 놓자 각국 대표팀은 착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FIFA는 ‘원러브’ 대신 ‘차별금지(No Discrimination)’라고 적힌 암밴드를 착용하라고 했고 잉글랜드 주장 해리 케인은 이란전에 이 밴드로 외침을 대신했다.

원러브 캠페인은 지난 9월 네덜란드축구협회에 의해 제안됐고 잉글랜드, 스웨덴, 독일, 벨기에, 스위스, 웨일스 등 총 7개국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 월드컵 개최지 투표에서 카타르에 표를 던진 프랑스는 초기에는 완장을 착용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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